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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빗소리 Nov 27. 2021

한결같이 상냥한

매일 조금씩, 당연함을 지우다   

  

언젠가 아는 동생이 나에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언니는 순진하진 않지만, 순수한 것 같아.”


꼭 철학적인 문장 같아 그 말을 오래도록 마음에 품었다. 무언가 나의 특징을 잘 대변하는 말 같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때 대화의 흐름과 말의 뉘앙스는 이런 느낌이었다. 이런저런 경험을 많이 했기에 뭘 모른다 할 순 없지만, 아직은 어린이의 순수함을 잃지 않았다는 것. 사람들은 가끔 시인이 된다. 나는 그들이 시인이 되는 순간을 놓치지 않고, 그들이 말한 시적인 문장을 머릿속에 담아둔다. 때론 노골적으로 네 말을 기억하고 싶다며 핸드폰 메모장을 꺼내 친구가 보는 앞에서 적기도 한다. 그때의 친구들 얼굴은 대부분 잔뜩 웃음을 머금고 있다. 아마도 자신의 문장을 소중히 생각해준다는 것에 기분이 좋았던 건 아닐까 생각해본다.      


순진하진 않지만, 순수함을 간직하고 있는 나는 어른들의 검은 속내를 들여다 보는게 가끔 못 견디게 힘이 들 때가 있다. 그들의 말과 행동이 때론 너무 자극적이어서 밤이 되어도 잊혀지지 않을 때도 있다. 아이들을 좋아하는 이유는 그런 이유이다. 말과 행동에 꾸밈이 없는 것. 자신의 생각이 곧 말이 되고 행동이 되는 것. 남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고 본인의 색깔 그대로 사는 것. 나는 그런 사람들 사이에 있는 걸 좋아한다. 아이들 틈바구니에 앉아 그들을 관찰하며 조용히 킥킥대는 건 내가 무척 좋아하는 일 중 하나이다.      


나는 초등학교 교사이다. 작가가 되려다 부모님의 거센 항의에 부딪혀 교사가 된 케이스이다. 20살 때는 이 문제로 엄마와 정말 자주 싸웠던 것 같다. 엄마가 나의 꿈을 망쳤다는 나의 분노와 너 나중에 나에게 절할 거라는 엄마의 확언 속에서 도무지 접점을 찾기 어려웠다.      


결론적으로 나는 지금 엄마께 감사하고 있다. 엄마는 나를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고등학생이 되어도 여전히 철딱서니 없던 내가 그런 순수함을 잘 발휘할 수 있도록 엄마는 교사를 추천했던게 아닐까. 엄마는 내가 순수한 사람들 사이에서 일하길 바라셨던 것 같다. 사실 나는 엄마를 많이 닮았다. 여전히 소녀 같은 60대 나의 엄마는 나의 노년을 조금은 기대하게 만드는 존재이다. 내가 해주는 작고 아기자기한 선물들에 뛸 듯이 기뻐하고, 아름다운 그림과 장소를 발견하면 행복해서 어쩔 줄 모르는 표정을 짓는 엄마를 바라보는 것이 참 좋다. 본인을 잘 알기에, 딸을 잘 알기에 딸이 아이들 안에서 즐겁게 살길 바라던 엄마의 마음. 이제는 엄마의 마음이 보인다.      


아이들의 그림을 보는 것이 즐겁다. 어떤 구김살도 없이 자신의 존재감과 야성, 개성을 숨김없이 뿜뿜 드러내는 아이들의 그림은 어느 것 하나 더 잘 그린 것 없이 아름답다. 목이 터져라 경쾌한 목소리로 종달새같이 불러대는 아이들의 노랫소리를 듣는 것도 좋아한다. 얼굴이 온통 시뻘개지도록 소리 내어 노래를 부르는 아이들의 얼굴을 가만히 관찰하는 것은 행복한 일과 중 하나이다. 바빠서 잠시 주말 인사를 잊은 내게 “선생님, 행복한 주말 되세요.”라며 다정하게 말해주는 아이들이 좋다. 인사하는 순간만은 나의 최대한의 다정함과 사랑을 담아 하려 노력하는데, 그게 마음에 들었는지 아이들도 그들의 최대한의 다정함을 담뿍 담아 내게 인사를 해주곤 한다. 그 다정함이 너무 놀라워서 아이들이 가고난 뒤에도 한참 먹먹할 때가 있다.     

 

교사가 된 이후 15년이 흘렀다. 얼마나 더 아이들 곁에 머무를 수 있을까? 아마도 지나온 시간만큼 남았단 생각이 드는데, 지난 시간이 쏜살같이 느껴져서 앞으로의 시간도 왠지 금세 지나갈 것만 같다. 그래서 가끔 슬픈 마음이 들기도 한다. 아이들이 내 곁에 있다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는 나의 굳은 마음을 매일 매일 제거하며 하루를 시작해야겠다. 차창에 낀 성에처럼 매일 제거해야 말갛게 그들의 소중함이 보일 것만 같다.    

  

다가오는 월요일이 되면 숨가쁘게 나에게 자신의 주말을 전하는 아이의 모습을 사랑이 담긴 눈으로 바라보는 내가 되길. 자신의 존재를 과시하길 좋아하는 그들의 귀여움에 고개를 열심히 끄덕여 주길. 당연해지는 것들을 매일 새삼 놀라워하는 내가 되길. 나의 직업에, 아이들과 함께 할 수 있는 이 자리에 참 감사한 주말 아침이다.




그들의 눈부신 연애     


우리 반 9살 아이들은 종종 나에게 비밀을 털어 놓는다. “선생님, 저 사실 유준이랑 사귀고 있어요.” 그들의 이런 고백은 나를 매번 놀라게 한다. 왜냐하면 사귄다는 표시가 전혀 나지 않으니까!     


아이들의 비밀을 알게 될 때마다 의구심이 든다. ‘사귄다’는 말의 뜻을 사이에 두고 아이들과 나 사이에 강이 흐르는 것만 같다. 한 번은 너무 궁금해서 ‘사귄다’라고 나에게 말한 둘의 모습을 한참 관찰한 적도 있다. 특별히 더 대화하지도, 특별히 더 같이 많이 놀지도 않고, 심지어 서로 연락을 주고받는다거나 하는 것도 없는 것 같은데 저들은 대체 어떤 방식으로 사귀고 있는 걸까.      


유준이와 예지가 노는  다시금 몰래 관찰하던 나는 어느 순간  말의 의미를 깨달았다. 그건 바로 ‘너의 존재만으로도 나는 행복해라는 의미였던 것이다. ‘나는  아이가 좋고,  아이도 나를 좋아해라는  마음 하나만으로도 아이들은 무척 행복해 보였다. 그것만으로도 그들은 충분했던 것이다. 어른의 속된 마음으로 아이들을 바라본 내가 부끄러워지는 순간이었다.     


어른의 연애가 저들보다 더 아름답다 말할 수 있을까? 때론 너무나 계산적인 어른들의 연애가 그들의 연애 앞에서 초라해 보인다. 서로의 존재만으로도 행복한 아이들의 사랑 앞에서 생각이 많아진다. 둘이 사귄다 말하면 니네가 연애를 아냐며 코웃음치던 내 버릇도 고쳐야겠다.   

   

나는 친구들의 존재만으로도 행복해하는 사람인가? 모든 관계 앞에서 진중한 모습을 놓지 않는 내가 되고 싶다. 아이들의 눈부신 연애를 바라보며 또 배운다.         


  


한결같이 상냥한


아름다운 그림책을 모으는 걸 좋아한다. 그림이 아름답던지 문장이 아름답던지. 어느 한 쪽이라도 아름다워서 내 마음을 찡하게 한다면 덥석 사는 편이다. 요즘 내가 꽂힌 그림책은 ‘가을에게 봄에게’라는 책이다.     

 

봄과 가을은 절대 만날 수 없는 사이이다. 그래서 봄은 가을이 궁금하고, 가을은 봄이 새롭다. 궁금한 서로에게 편지를 쓰기로 한다. 봄은 벚꽃에 대해서 알려주고, 일년 뒤 가을은 코스모스와 단풍, 가을 밤 풀벌레 소리에 대한 답장을 보낸다. 편지를 보내면 일 년 뒤에나 받을 수 있는 답장이라니. 무언가 아련하면서도 낭만적이게 느껴졌다.      


봄은 가을의 풍성함과 달리 스스로가 초라하게 느껴진다. 일 년 뒤 봄은 이런 답장을 받는다. ‘봄과 편지를 나누는 동안 나에게도 좋은 모습이 있다는 걸 깨달았어요. 계속 만나지 못해도 마음 속에는 언제나 아름다운 봄이 있어요.’ 아, 이런 가을의 다정함을 어쩌면 좋을까.


마지막에 나오는 겨울의 한마디가 내 마음에 오랜 여운으로 남았다.      

“아직 몰랐니? 너희는 꼭 닮았는걸. 너무 뜨겁지도 않고, 너무 차갑지도 않고, 한결같이 상냥한 계절.”     


어떻게 계절한테 ‘상냥함’이란 단어를 붙여줄 수 있을까? 작가의 상상력에 깜짝 놀란다. 하긴 정말 그렇다. 뜨겁지도 않고 차갑지도 않은. 다가올 여름의 열정과 겨울의 아릿함을 조금은 쉽게 받아들이게 만드는 상냥한 계절들.     


‘한결같은 상냥함’. 봄과 가을을 닮은 이 문구가 좋다. 좋은 그림책을 읽으면 매번 좋은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한결같이 상냥한 그림책이 많아 행복한 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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