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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빗소리 Jan 01. 2022

2022, 실패의 자유

# 안녕, 2021!


어제를 끝으로 2021년의 모든 날들이 추억이라는 이름으로 돌아섰다. 지나가는 날들과 좀 찬찬히 이별하고 싶은데, 왜 항상 연말은 정신없이 바쁜지....... 이번 연말도 몇 번의 야근과 함께 부리나케 끝나버렸다. 원래 계획은 차분하게 손글씨로 나의 넘치는 고마움을 소중한 사람들에게 하나씩 전하고 싶었으나, 결국 체력과 정신력의 부족으로 몇몇 친구들에게만 겨우 손편지와 메시지를 통해 마음을 전했다.


2021년. 나는 3년의 육아 휴직 후 첫 복직을 했다. 교사보다는 엄마라는 말이 더 익숙한 몸과 마음으로 학교에 돌아갔다. '얘들아'라고 해야 하는데 '호두야'라는 말을 종종 썼고, '선생님이'라는 말 대신 '엄마가'라는 말을 쓰곤 했다. 스스로의 정체성이 교사인지 엄마인지 아직도 분간이 가지 않은 채로 나의 3월은 흘러갔다. 오랜만에 간 학교는 너무나 추웠고, 복직 전에 알았던 얼굴은 거의 남아있지 않은 학교의 인간관계는 삭막하게만 느껴졌다.


크고 작은 풍랑이 있었고, 그 틈새에서도 우정은 싹텄다. 아이들이 나의 진심을 눈치채기 시작했고, 내 곁에 마음이 상당히 예쁜 동료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교장, 교감선생님은 어리바리해 보이나 시간 맞춰 일을 해내긴 해내는 나에 대해 조금씩 마음을 놓으셨다. 나를 바라보는 눈빛의 색깔이 조금씩 달라지고 있음을 직감적으로 느꼈다. 뭐랄까. 나는 내 이익에 관련된 일에 눈치가 빠른 사람은 못되지만, 누군가의 눈빛 색깔의 변화 같은 사소한 일들에는 이상하게 눈치가 빠른 편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나를 둘러싼 여러 공기들이 달라졌음을 느끼고, 나는 비로소 조금씩 학교 생활에 안도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고민이 많아서인지 위염을 앓기도 했다. 나는 스트레스가 쌓이면 마음껏 표현하는 사람이 아니라 안으로 안으로 파고드는 사람인데, 그런 것들이 가끔 내 위를 불편하게 한다. 위염으로 몇 주간 음식의 즐거움을 느끼지 못하니 살이 쭉 빠지기도 했다.


어느덧 다가온 연말. 지난 2월 전근을 하려던 시도가 실패하고, 다시는 돌아가고 싶지 않던 이 학교로 돌아오며 나는 참 많이 슬펐던 것 같다. 10개월이 지난 지금은 아이러니하게도 이 학교에서의 모든 시간이 너무나 감사하고 행복했다는 생각이 든다. 소중한 추억을 빼곡하게 만들었다.


안녕, 나의 소중했던 2021. 힘겨웠지만, 그 어느 순간도 최선을 다하지 않았던 시간은 없었음을 고백할 수 있어 감사하다.




# 2022, 실패의 자유


여러 번 내 글에 쓴 적이 있지만, 가족과 친구들은 나에 대해 자주 '강하다'라는 표현을 쓰곤 한다. 실제로 나는 의지가 강한 편이라 목표로 세운 일이 있으면 열정을 다해 어떻게든 그 목표를 이루려고 노력하는 편이다. 아마도 그런 면에 있어서 강하다는 표현을 자주 듣는 게 아닐까 생각한다.


누구든 그렇겠지만 스스로가 생각하는 나는 많이 나약하다. 겁과 두려움이 많다. 해보지 않은 일들을 하는 것을 무척 두려워하고, 가보지 않은 길을 무서워한다. 어렵다 정평이 난 것은 아예 시도할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2022년. 쉬이 움츠러들었던 2021년의 나를 뒤로 하고, 올해는 좀 더 많은 실패를 겪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마음껏 실패하는 자유를 느껴봤던 해가 언제였던가. 올해라도 꼭 마음껏 실패하는 자유를 누려보고 싶다. '실패'라는 단어가 새해 첫날에 잘 어울리지 않지만, 나는 새해 첫날부터 '실패'를 말하는 자유를 만끽하려 한다. 많이 실패하며 인생 수업료를 톡톡히 내는 한 해를 만들어 보고 싶다.




# 윤이에게 151번째 반한 순간


내가 최근 읽고 무척 사랑하게 된 책 '어린이라는 세계'에는 이런 에피소드가 나온다.




칠판에 "서로 몸이 달라도 _____자."라고 썼다.

내심 '존중하자'라는 말이 나오기를 기대하면서 예지의 답을 기다렸는데 선뜻 답을 하지 못했다.

"예지야, 그럴 때 '무시'의 반대말을 떠올려 보면 좋아."

"아! 알았다!"

유일한 답이라는 듯, 예지는 이렇게 썼다.

"서로 몸이 달라도 같이 놀자."

그 순간 나는 예지에게 백오십 번째로 반했기 때문에 정신이 혼미해졌지만 '존중'이라는 단어를 가르치겠다는 일념으로 다시 기회를 줬다. 예지는 이번에는 이렇게 썼다.

"서로 몸이 달라도 반겨 주자."

백오십 한 번째 반한 상태로 나는 두 문장 옆에 각각 하트를 그리고, 조그맣게 '존중하자'라는 말도 적었다.

-김소영의 '어린이라는 세계' 중에서



김소영 작가와 예지의 티키타카가 사랑스러워서 이 부분을 읽을 때마다 자꾸 새어 나오는 미소를 감출 수 없다. 매일 아이들을 대하는 직업이다 보니 나도 특정 어린이에게 백오십 한 번째 반하는 순간이 있다.


윤이는 상당한 노력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적은 하위권이지만, 나는 수업 시간에 늘 단위 과제를 해결하려 성실히 노력하는 윤이의 모습을 무척 사랑한다. 솔직히 공부 잘한다 해서 특별하게 살아가는 것이 아니기에 나는 오히려 윤이처럼 성실하게 살아가려는 그 모습 자체가 얼마나 삶에서 중요한 것인지를 더 생각하곤 한다. 그런 윤이가 보여주는 열정들은 내게 수많은 '반하는 순간'을 선사하곤 한다.


이런 모습에도 이미 내가 윤이에게 빠질 일은 충분하건만 윤이는 모든 친구에게 무척이나 공정하다. 반에서 자주 소외되고 뒤처지는 친구들까지 공평하게 아우르며 누구 하나 소외되는 이 없이 놀이를 이끄는 윤이를 바라보는 것은 무척 벅차다.


어제는 일 년 동안 나와 수업을 함께 해오신 협력 강사님이 출근하시는 마지막 날이었다. 아이들에게 마지막 인사를 하시고 이제 가시려는 준비를 하는 협력 강사님에게 가까이 다가선 윤이는 협력 강사님 앞에서 금방이라도 눈물이 터져 나올 것 같은 그렁그렁한 눈으로 서 있었다. 절대 울지 않고 그 눈으로 한참을 말없이 강사님을 바라보는 윤이의 모습에 나는 말 그대로 151번째 반하고 말았다. 윤이는 끝까지 한 마디도 하지 않았지만, 협력 강사님도 나도 윤이가 눈으로 전하는 수많은 말을 이해해버리고 말았다.


윤이와 함께 한 한 해를 돌아보며, 윤이의 존재에 매일 소중함을 고백하지 않았던 내 스스로의 모습이 반성된다. 이렇게 헤어질 줄 알았다면..... 매일매일 윤이의 예쁜 모습을 바라볼 수 있는 매 순간을 좀 더 충실하게 살았을 텐데. 윤이야 너는 정말 멋져라고 더 많이 말해줄걸. 그럼에도 불구하고 9살 윤이의 아름다운 삶의 한 부분을 공유할 수 있어서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를 생각해본다.


윤이야, 정말 고마워. 너랑 같은 교실에서 한 해를 살 수 있어서 행복했어!




# 들리지 않는 기훈이의 말


앞서 말했듯 나는 내 이익과 관련된 일에는 눈치가 좀 떨어져서 손해를 볼 때가 있으나 이상하게도 어떤 사람의 아주 사소한 변화도 금방 알아챈다. 남을 빤히 쳐다보는 일이 괜히 쑥스러워서 다른 이를 자세히 관찰하는 일은 잘하지 않지만, 이상하게도 섬세한 변화들에는 민감한 편이다.


섬세하고 예민해서 툭하면 나에게 자주 삐지는 기훈이 이지만, 과제물을 제출하러 와서 아이들이 마구잡이로 낸 과제물의 모서리를 조금씩 다듬고 가는 기훈이의 행동에서 나는 기훈이의 마음을 읽는다. '선생님, 저 선생님과 다시 잘 지내보고 싶어요.' 기훈이가 딱히 그런 말을 한 것도 아닌데, 기훈이와 몇 달 지내다 보니 기훈이의 행동에서 그런 말이 들릴 때가 있다. 과제물의 모서리를 다듬고 가는 기훈이의 신호를 따라 다음 쉬는 시간에 무심코 말을 걸어보면 아니나 다를까 기훈이의 마음이 꽤 풀렸다는 게 느껴진다.


주의 깊게 보이지 않으면 결코 들리지 않는 기훈이의 말. 그 말을 알아들을 수 있어 감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끊임없이 내게 들리지 않는 말 걸기를 멈추지 않는 기훈이에게도 고맙다. 우리가 서로 소리 내어하지 않았던 여러 대화들이 우리의 관계 위에 차츰차츰 쌓였다.


앞으로  앞에 나타날  다른 기훈이들을 위해 나는 여러 감각으로 듣는 교사가 되어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작은 행동으로 보여주는 그들의 말을 결코 놓치는 법이 없도록. 때론 수많은 대화보다  없는 대화가 서로의 유대를  깊게 하기도 한다는  기훈이를 통해 배운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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