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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빗소리 Feb 06. 2022

너나 나나

멀리서 보면 티끌인 우리의 차이

"뵙고 싶은데, 어디로 가면 돼요?"


7년 전 제자들에게 연락이 왔다. 이제 막 20살이 된, 어른으로서의 발걸음을 막 뗀, 말하자면 첫 어른들이었다. 장소를 물어보는 제자들의 대답에 순간 잠시 당황했지만, 이내 속뜻을 알아챘다.


"어디로 가긴 어디로 가. 밥 사줄게. 밥 먹자."


생각해보니 그랬다. '선생님, 수능 끝났어요. 밥 사주세요.'라고 말하는 쉬운 방법이 있었는데, 녀석들의 말 속에 예의에 대한 고민이 묻어났다. 여러 번 생각하고 말하는 그 다정함이 좋아 웃음이 나왔다. 여전하구나 싶어서.


아이들을 생각하다가 7년 전 겨울, 편의점 앞에서 울고 있던 내 모습이 불현듯 떠올랐다. 밥 먹고 그냥 들어가기 아쉬워 선배들과 편의점 앞에서 음료수 마시며 잠깐 담소를 나누는 자리였다. 6학년 아이들 가르치느라 고생 많았다는 선배의 말에 밑도 끝도 없이 왈칵 눈물이 나왔다. 졸업식을 앞두고 있었고, 아이들을 보낼 준비를 하느라 일분일초가 바쁠 때였다. 처음으로 가르쳐본 6학년이었고, 처음으로 대화가 통하는 아이들이었다. 너무 좋았나보다. 겁도 없이 마음 전부를 덥석 줘버렸으니. 마음을 주면 그만큼의 고통이 따른다는 걸 이미 알만한 33살이었고, 스스로의 성격을 알기에 아이들을 좋아해도 적당히라는 선을 그동안 잘 지켜왔다고 자부했다. 그런 금기를 처음으로 깬 한 해였다.


"어떡하죠. 이제 못 본다 생각하니 너무 가슴이 아파요."


계속 눈물을 훔치는 내 앞에서 선배들은 침묵을 지켰다. 위로도, 조언도 없었다. 그때 내가 본 것은 살짝 웃고 있는 선배들의 모습이었다. 모두 똑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 표정의 의미가 궁금해질 때쯤 한 선배가 침묵을 깼다.


"야, 네가 부럽다. 그렇게 쏟을 마음이라도 있다는 게."


아이들에게 온 마음을 던지는 것도 다 때가 있었다. 부러움이 묻어 났던 선배들의 말이 이제는 이해가 가는 걸 보면.


아이들을 만나러 갈 준비를 하면서 외모에 자꾸 신경이 쓰였다. 30대에 만났던 아이들을 40대에 만나야 하니 신경이 안 쓰일 수 없었다. 가장 멋진 모습으로 나가고 싶었지만, 또 그렇게 잔뜩 멋 부리고 가는 것도 어쩐지 쑥스러웠다. 거울 앞에서 스스로와 매우 치열한 외모 담판을 거친 뒤 집을 나섰다.


시내 앞에서 엉거주춤 서 있는 아이들이 보였다. 7년의 공백이 어색했지만, 용기 내어 더 밝은 모습으로 아이들을 불렀다.


"선생님, 꽃 사 오려 했는데, 문을 닫았네요."

"뭐야, 아까 꽃집 앞에서 서성이던 애들이 너네였어?"


꽃을 선물하려 했다니......꽃을 좋아하는 나를 아직도 기억하고 있구나. 왠지 미안해하는 아이들에게 마음으로 이미 받아버렸다고 너스레를 떨며 넘어갔지만, 진짜 꽃을 안은 듯 벅찼다.


서로 무슨 말을 해야 할까 고민했는데, 분위기 메이커 정헌이의 존재를 까먹었던 게 불찰이었다. 정말 잠시도 쉴 새 없이 빈틈마다 적절한 주제를 던지는 정헌이 덕에 식탁 위에 우리들의 이야기가 촘촘히 쌓였다. 6학년 때의 이야기, 대학 진학 이야기, 쉬는 게 일이라는 수능 후의 이야기 등등. 그중 가장 흥미로웠던 건 아이들이 기억하는 내 모습이었다.


과거의 나는 마치 30개의 CCTV로 다양한 각도를 활용하여 찍은 듯 다채로웠다. 내가 기억하는 나와 사뭇 달랐다. 그중 정헌이의 말이 가장 놀라웠다.


"선생님, 그때 왜 우리 경주 수학여행에서 첨성대 보러 간 밤 있잖아요. 저 점퍼 안 입고 가서 떨고 있는데, 선생님이 점퍼 벗어주셨던 거 기억나세요?"


"내가? 설마~"


추위라면 지긋지긋한 내가 설마 정헌이에게 점퍼를 벗어줬을까. 네 기억이 왜곡된 거 아니냐고 여러 번 물어봤지만, 정헌이는 절대 아니라고 단호히 말했다. 정말 내가 그랬다니.... 충격이었다. 그것도 정헌이에게?


13살 정헌이는 톰 소여 같은 소년이었다. 도덕과 비도덕 사이의 선 위를 걷는 걸 즐겼다. 나는 늘 정헌이가 헷갈렸다. 친구에게 짓궂은 장난을 건 정헌이가 도덕적인 것인지 비도덕적인 것인지. 장난은 항상 그런 식이었다. 딱 경계까지만 머무는. 절대 선을 넘지 않으나 선의 끝까지 가버리는. 정헌이가 두려웠다. 더 정확히 말하면 정헌이가 혹시라도 가게 될 잘못된 길이 두려웠다. 내가 지금 잘 붙잡아 주지 않으면 혹시라도 그 선을 곧바로 이탈해버릴까 봐 자꾸 친구를 울리는 정헌이를 호되게 혼냈다. 어린 정헌이의 마음은 도무지 보이지 않았고, 혹시 모를 나쁜 미래에 대한 상상은 눈앞을 더욱 캄캄하게 만들었다.


정헌이에게 전해  들은, 그리고 정헌이의 가슴속에 남아 있는 나는 그 벗어준 점퍼로 덮여 있었다. 수줍게 말을 꺼내는 정헌이의 미소를 보며 7년 넘게 가지고 있던 죄책감이 주소를 잃었다. 매일 혼내던 나를 정헌이는 어떻게 생각할까. 길가다 정헌이를 마주치면 어떻게 인사해야 하지? 그런 생각들로 채운 7년이었다. 이런 나와 달리 정헌이는 나를 오래도록 고마워만 하고 있었다. 우리 사이의 오래 묵은 동상이몽을 깨준 정헌이의 한 마디가 고마웠다. 어쩌면 이 소리를 들으려고 오늘 우리의 만남이 성사된 건 아닐런지.


순탄한 가정환경과 물 같은 성정을 가진 예인이는 여전히 예인이 답게 살고 있었다. 예인이의 미래는 걱정해본 적이 없던 것 같다. 어딜 가도 예인이는 마치 거기 원래부터 있었던 나무처럼 자연스럽게 녹아들 아이이니 말이다. 여전히 가족에게, 친구들에게 사랑받고 있었고, 자신의 실력만큼 그리 욕심부리지 않고 지원한 대학은 별다른 어려움 없이 합격했다. 부러운 삶이다. 13살에도 부러웠던 예인이가 지금도 부럽다. 그 부러움은 적당한 포기와 적절한 순응으로 이루어지는 성정이 만들어 낸 산물일 것이다. 그래, 예인이는 그렇게 살만 했다. '적당함'은 '넘침'과 '부족' 사이의 어딘가쯤을 찾아내는 기막힌 감각이니까. '넘치고 싶던' 아쉬움과 후회를 담담히 받아들이는 강인함이니까.


오늘 만남에서, 아니 7년 전 그 해부터 늘 내 마음을 끄는 가연이 또한 여전히 가연이 답게 살고 있었다. 예쁘고, 머리까지 좋은 가연이었지만, '가난'이라는 무게에 짓눌려 어쩐지 자주 위축되는 아이의 모습은 꼭 어린 시절의 나를 닮은 것 같아서 마음이 쓰였다. 리더십이 있어 친구들 사이에서 자주 리더의 역할을 도맡는 가연이었지만, 어둠은 항상 그림자처럼 뒤를 따라다녔다. 아직 어렸던 아이들은 가연이의 그림자를 쉬이 눈치채지 못했지만, 그리고 어쩌면 꽤 많은 선생님 또한 그 그림자를 놓쳤겠으나, 나는 가연이를 보자마자 알 수 있었다. 그건 바로 13살의 내가 가지고 있던 그림자의 모습 그대로였으니까.


가연이를 종종 태워주는 일이 있었는데, 우리 학구 안에서도 가정 형편이 어려운 아이들만 살아가던 비좁은 평수의 연립주택 구역에서 가연이가 내리곤 했다. 내가 담임이니 당연히 주소를 알았음에도 불구하고, 그곳에서 내리는 아이의 얼굴은 흙빛이었다. 가연이의 가난을 모른 채하면서도 나의 아팠던 과거를 넌지시 흘리곤 했다. 지독한 가난이었지만 그조차 과거가 되어버렸다고. 내 이야기는 대부분 그렇게 마무리되었던 것 같다. 아무 표정 없는 가연이었지만, 가연이가 알길 바랐다. 가연이가 늘 힘겨워하는 '그것'이 언젠가는 그냥 이렇게 대화의 한 소재처럼 작아질 뿐이라는 것을.


언어 공부에 유달리 재능을 보였던 가연이는 독어독문학과에 진학했다. 데미안을 15번이나 읽었다는 가연이를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얼마 전 데미안을 읽고 헤세가 만든 깊고 놀라운 세계에 무척 충격을 받았던 나는 10대의 가연이가 데미안을 궁금해했다는 것, 그래서 15번이나 읽으며 그 의미를 알아보려 노력했다는 것이 멋져서 새어나오는 감탄을 숨길 수 없었다. 나에게 꽃을 사들고 오려했다는 가연이. 데미안을 15번이나 읽었다는 가연이. 그런 가연이가 내 제자라는 것이 새삼 행복했다. 가연이는 나의 바람대로 멋지게 성장해있었다.


꼰대가 되지 않으려 입을 되도록 닫고 있자 다짐하고 나온 길이었다. 가연이의 말을 듣기 전까지는 말이다.


"선생님, 저는 이제 좀 비관적인 사람이 된 것 같아요."


친구들을 보낸 자리에서 비로소 속내를 드러내는 가연이가 애틋하고 안쓰러워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가연아, 너는 비관적인 것이 아니라 이지적인 거지. 이성적이고 냉철한 거야. 넌 13살 때도 그랬어. 그냥 지금도 원래의 너로 살고 있는 걸. 선생님은 매일 감수성이 흐르고 넘쳐서 살기가 어려워. 우리는 각자 자신의 성정대로 살아가는 거야. 가연아. 너무 잘하고 있어. 가연이는 가연이대로, 선생님은 선생님대로. 그렇게 최선의 나로 살아가면 돼. 우리 가연이는 깊게 사는 사람이니까, 이제는 좀 더 넓게 살아보자. 서울 올라가면 전시회도 자주 가고, 대학로 공연도 많이 보고, 책도 많이 읽어. 알바도 좀 해놨다가 코로나 끝나면 당장 비행기 타고 나가보는 거야. 되도록 많이 실패하고, 경험에 모든 돈을 써. 그렇게 세상을 넓고 깊게 살아가다 보면 가연이가 진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가 보일 거야. 가연이가 원하는 그 모습대로 살아봐."


얼마 안 남은 헤어짐을 앞두고 이제까지 참아왔던 이야기를 모두 쏟아냈다. 차창 밖 하늘에 내가 좋아하는 개와 늑대의 시간이 펼쳐져 있었고, 가연이는 언제나 그랬듯 아무런 대답 없이 듣고만 있었다. 꼰대가 되지 말자 다짐했지만, 나는 역시 꼰대였다. 그래도 가연이를 위해서라면 무슨 말이라도 해주고 싶은 선생님의 마음이었다.


어이구, 이 꼰대. 집에 돌아가는 길 내내 스스로의 꼰대질을 후회하며 왔는데, 가연이에게 문자가 도착했다.


"선생님, 저 오늘 선생님이랑 만나며 힐링 에세이를 읽는 느낌이었어요. 저는 선생님이랑 보내는 시간이 행복해요. 방학되면 종종 봬요. 감사해요."


 꼰대질을 힐링 에세이로 마무리해주는 가연이의 다정함이란. 편의점 앞에서 내가  울었는지 이해가 간다. 우리 아이들은 그냥 내가 무슨 말을 해줘도 '사랑'으로 번역해버리고마는 놀라운 능력의 아이들이었다. 아이들과 선물 같은 한 해가 내 인생 안에 있었다는 것은 두고두고 감사하며 황송해해야  복이었다.


집에 와서 곰곰이 하루를 되짚어 보다가 아이들에게 정말 하고 싶은 말이 생각났다. 이제는 할 수 없는 말, 그리고 어쩌면 언젠가 우리에게 다시 만나는 행운이 온다면 해주고 싶은 말.


"얘들아. 20대나 40대나 100살 할머니가 바라보면 모두 다 그저 귀여운 어린아이 같을 거야. 지구의 나이로 바라본다면 너희들과 나의 차이는 티끌 같겠지. 나나 너희나 그저 우리는 함께 성장해가는 어른인 걸. 선생님도 잘 커 갈게. 너희들도 잘 커줘. 이제는 너희들 선생님이 아니라 친구라는 자리여서 더 좋다. 또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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