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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빗소리 Feb 12. 2022

나의 별들

그리고 나의 엉뚱한 야망

GPS와 시계가 없던 시절. 사람들은 별의 위치를 보며 방향을 짐작했고, 별의 움직임을 보며 시간을 어림했다. 그러다 길을 잃었을 수도 있고 서로 생각한 시간에 만나지 못하고 엇갈렸을 수도 있지만, 그렇다고 그들의 방향과 시간이 우리보다 어리석다 할 수 있을까. 잘못 들어선 길에서 만난 꽃 한 송이가 그들을 행복하게 만들었을 수도 있고, 친구를 기다리며 바라본 하늘이 아름다워 가슴이 뭉클했을 수도 있는 것을.


승진을 하겠다고 마음먹은 지 이제 1년. 동기들이 한창 일할 때 나는 아이와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싶다는 생각으로 3년의 휴직을 감행했고, 승진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라 스스로 생각했다. 그러다 복직을 하게 되었고, 부장 할 사람이 없다는 이유로 반 강제적인 부장 생활을 시작했다. 부장 생활을 시작하면서도 정말 내가 승진을 해야 하는 것인가 고민하며 갈팡질팡했지만, 1년 동안 부장으로 살며 아이들과 선생님들을 위해 좋은 관리자가 되고 싶다는 꿈을 품게 되었다.


그동안의 2월 업무 분장은 어떻게 하면 '일을 좀 덜할 수 있을까!'를 고민했다. 올해 처음으로 승진에 대해서 고민하며 업무 분장에 참여하게 되었는데, 막상 이렇게 참여하여 보니 그 길이 얼마나 치졸하고 수많은 이기심과 욕심에 부딪혀야 하는지를 금세 깨닫게 되었다. 고작 처음 해본 것인데, 이미 마음이 지쳐버렸다. 와, 이게 승진이구나! 이런 것을 진심으로 느꼈다고 할까?


지난밤 내 일기를 본 친구가 새벽에 장문의 메시지를 보냈다. 승진이란 아더 매치한 과정(아니꼽고 더럽고 메스껍고 치사한) 속에서 자신이 느낀 역겨움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과정 속에서 우아하게 자신의 길을 찾아 간 선배들에 대한 존경. 그런 일들 때문에 상처받지 말라고, 너는 너의 길을 가라고. 친구는 긴 장문의 글 속에서 나에게 외치고 있었다.

 

친구의 메시지를 읽고 곰곰이 생각해보니 나에게도 '별'들이 있었다. 나의 별들. 그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어 글을 시작했다.


상진 선배. 몇 년 전 상진 선배는 내신을 쓰는 나에게 자신의 학교로 와달라 말했다. 평소 나를 아끼던 선배는 네가 우리 학교로 와주면 아주 극진히 대접(?)하겠다 약속했다. 당시 선배는 교무부장이었고, 나를 함께 일할 동료 부장으로 부른 것이다. 그러나 상진 선배의 학교와 우리 집의 거리는 무려 40분. 왕복 80분의 벽을 나는 넘지 못했다. 그렇게 10분 거리 학교로 내신을 썼는데, 그해 내내 속 쓰리게 후회했다. 당시 학교의 분위기는 엉망진창이었고, 툭하면 교사끼리 싸움이 나곤 했다. 비록 80분의 출퇴근 시간은 있었겠으나 상진 선배의 인자한 그늘 아래 살 수 있었던 해였는데..... 뒤늦은 후회를 계속 반복했다. 나중에 알게 되었는데, 이기적인 동료를 만나서 상진 선배 또한 일을 몇 배로 덤터기 쓰며 힘들게 살았다고 한다. 나의 선택으로 우리 둘 다 힘들어진 것이다.


착한 상진 선배는 툭하면 업무 분장에서 덤터기를 쓰곤 했다. 너무 이른 나이에 필요도 없는 교무 부장의 자리에 강제로 앉게 되기도 했고, 필요 없는 업무들이 자꾸만 굴러 들어와서 매일 야근을 하기도 했다. 상진 선배 이야기를 전해 들을 때마다 마음이 너무 아파서 걱정했는데, 10년이 지난 뒤 깨달았다. 비록 남들이 볼 때는 미련 곰퉁이 같던 상진 선배의 승진 길이었으나 지금은 누구보다 존경받고 함께 일하고 싶은, 그리고 교감 승진을 앞둔 선생님이 되었다는 것을. 상진 선배가 억지로 맡았던 긴긴 교무부장의 시간은 학교를 전체적인 시각으로 보는 깊이 있는 시각을 만들었고, 이리저리 잡스럽게 했던 모든 업무가 상진 선배로 하여금 많은 이의 업무를 모두 이해하게 하는 공감 능력을 갖게 했다. 결국 상진 선배는 좋은 인성에 실력까지 갖춘 선배가 된 것이다.


명희 선배. 인성으로 말할 것 같으면 명희 선배도 절대 빠질 수 없다. 내가 우리 지역에서 가장 존경하는 선배이다. 명희 선배는 내가 아는 한 실력과 인성의 밸런스가 가장 뛰어난 교사이다. 동료 교사들을 보호하기 위해 때로는 관리자들에게 강하게 반기 들기를 주저하지 않았던 멋진 부장, 명희 선배. 나는 명희 선배에게 마음의 빚이 있다.


몇 년 전, 나는 명희 선배와 내가 같은 것을 원하는지도 모르고 실수를 해버렸다. 명희 선배가 원하던 걸 내가 가져갔고, 거기다 말실수까지 해버린 것이다. 당시 철딱서니가 없던 나는 상황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저녁에 걸려온 명희 선배의 전화가 아직도 기억난다.


"정말 축하해. 잘됐어."


명희 선배는 진심으로 축하해줬고, 나는 그 축하전화를 기쁘게 받았다. 한참 뒤 들려오는 소문에 소스라치게 놀라기 전까지는. 명희 선배가 원하던 것을 내가 뺏은 형국이었고, 그런 나에게 명희 선배는 진심으로 축하를 전한 대인배였던 것이다. 그일 이후로 나는 명희 선배 낯을 뵐 면목이 없어서 자주 피했는데, 명희 선배는 쿨하게 나를 용서했고 어쩌다 나를 만나면 그렇게 반갑게 인사할 수가 없었다. 몇 년 후 교감 승진을 한 명희 선배에게 용기를 내어 축하 인사를 건넸다. 그 학교 선생님들은 무슨 복이 있어서 명희 선배 같은 사람을 교감으로 만나냐고. 전생에 나라를 구했나 보다고. 그러자 명희 선배가 함께 덕담을 해주었다.


"도 누구나 함께 일하고 싶은 후배야.”


나는 진심으로 감동받았다. 그때 그 말을 하던 명희 선배의 표정과 말소리, 우리 주변을 둘러싼 배경들을 나는 지금도 똑똑히 기억한다. 그 말은 나에게 매우 기분 좋은 충격이었으므로. 말이 가진 의미에 감동받았기보다 그 말을 해준 이가 명희 선배여서 감동받았다. 내가 가장 존경하는 선배에게 인정을 받은 경험이었으니까. 그리고 어찌 보면 용서할 수 없는 나에게 건넨 명희 선배의 너른 용서와 사랑이었으니까. 그 말은 내 자신이 초라하게 느껴질 때마다 나의 머리에서 다시금 메아리로 울려 힘을 내게 했다.


지난밤, 나는 상진 선배와 명희 선배에 대해 오래도록 생각했다. 치졸하기 이를 데 없는 이 전쟁터에서 상진 선배와 명희 선배는 정확한 GPS와 시계가 가리키는 큰길이 아니라 별에 의지하여 자신들만의 오솔길을 찾아 모험을 떠났다. 그 오솔길 끝에 목적지가 있는지도 알지 못한 채로. 때론 오솔길에서 돌부리에 걸려 넘어져 피도 나고, 갑자기 뒤에서 덮치는 강도로 인해 가진 것을 빼앗기기도 했으나 선배들은 꽃 한 송이에 행복해지는 작은 마음과 푸른 하늘이 주는 평안함을 결코 빼앗기지 않았다. 그렇게 꽃 보고 하늘 보며 천천히 걷다가 목적지에 잘 도착한 것이다.


나의 별들에 대해 생각한다. 자신만의 아름다운 길을 잘 찾은 나의 선배들, 그리고 내게 힘이 되고 의지가 되어주는 나의 별 같은 친구들. 내가 바라보며 의지해야 할 방향이 그곳에 있다.


업무 분장의 시간을 보내며, 나는 오히려 더 굳건히 마음먹었다. 아무도 상처 주지 않고, 때론 바보 같은 상황이라도 감수하며, 나는 나의 길을 가겠노라고. 그게 내가 선택한 이 상황의 가장 우아한 방식이다. 빨리 가기보다 우아하게 가겠다. 나 또한 누군가의 별이 되고 싶으니까. 그것도 아주 밝은 시리우스. 그것이 바로 나의 야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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