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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빗소리 Feb 27. 2022

다정은 병이 맞다

올해 나의 업무는 '교무' 업무이다. 교무부장을 맡은 것이다. 학교 업무의 끝판왕인 교무부장에게는 원하는 학년을 선택할 수 있는 여지가 주어진다. 가장 업무가 많으니 나름의 배려 차원이다. 어떤 학년을 원하냐며 묻는 질문에 고민하지 않고 대답했다.


"2학년이요!"


사실 대부분의 학교에서 2학년은 '꿀학년'이라는 별명이 있을 만큼 무척 선호하는 학년이다. 아이들이 귀여운 시기이고 선생님 말도 곧잘 듣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 학교는 사정이 다르다. 우리 학교에서 가장 장난꾸러기들이 많은 학년이다 보니 생활지도가 쉽지 않아서 다들 맡기를 꺼려하는 학년이다. 나의 대답에 교장, 교감선생님 모두 당황하셨다.


"안돼. OOO 선생님은 맨날 울 거 같아."


교장선생님의 반응에 피식 웃음이 나왔다. 친한 친구들 사이에서 걸크러쉬로 회자되는 내 모습을 교장선생님은 알리가 없으시다.


"아니에요, 교장선생님. 저 그렇게 순하지 않아요!"


변명해도 소용이 없었다. 강하다는 것을 증명할 수도 없고 답답하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걱정하시는 교장선생님과 그렇게 힘없이 1차전이 끝났다. 다음날 교장실로 불려 가며 2차전이 시작되었다.


"있잖아. 혹시 남들 힘들까 봐 덤터기 쓰려 그러는 거야?"


진심으로 걱정하시는 교장선생님의 표정이 외람되지만 좀 귀엽게 느껴졌다. 가뜩이나 업무가 힘든데, 왜 학년까지 힘들게 가려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하셨다. 이렇게 몰릴 때는 솔직함만이 정공법이란 생각이 들어 그냥 내 생각을 말했다.


"2학년 아이들 제대로 한 번 가르쳐보고 싶은 마음이 들어요. 잘해볼게요. 믿어주세요."


내 솔직한 발언에 할 말을 잃으신 교장선생님은 일단 나가보라고 하셨다. 그리고 다음날 나는 2학년 담임교사가 되었다.


내가 2학년을 맡고 싶었던 이유는 좀 여러 가지이지만, 앞서 말했듯 가장 큰 이유는 아이들을 좀 잘 이끌어주고 싶은 마음이기 때문이다. 나는 통통 튀는 아이들을 좋아하는 편이고, 장난꾸러기에게 차분함과 멋짐을 장착하게 하는 데에 소질이 있다. 솔직히 큰소리쳐놓고 올해 말에 '잘해보긴 뭘 잘해봐'라는 혹평을 들을까 봐 좀 무섭긴 하다. 그래도 최선을 다하고 싶다. 경험상 많이 사랑해준다면 아이들은 반드시 부드러워진다. 그래서 그냥 많이 사랑해주면 되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생각도 가지고 있다.


나는 아무도 보지 않는 시간에 그 사람이 무엇을 하는가가 결국 그 사람의 삶을 좌우한다 생각한다. 오늘 나는 학교에 혼자 출근했고, 그 시간은 아무도 보지 않는 시간이었다. 아무도 보지 않지만, 내 삶을 좌우하는 이 시간. 내 삶에서 무엇이 중요한 것일까 생각해봤다. 업무가 무척 쌓여있지만, 사실 내게 가장 최우선은 아이들이다. 아이들을 위해 무언가 해주고 싶었다. 교실을 빙 둘러보고 드디어 할 일을 찾았다. 스티커제로 인해 얼룩덜룩 누더기가 된 사물함 문짝을 깨끗하게 만들어주는 일. 티가 안 나고, 한다 해도 아무도 눈치 못 채겠지만, 나만의 사랑 표현 방법이다. 아이들을 위해 꼭 해주고 싶었다.


처음의 패기와 달리 10 만에 금세 지쳐버렸다. 너무 오랜 세월 더깽이가  얼룩이라 스티커 제거 스프레이와 매직폼으로도 쉬이 해결되지 않았다. 힘을 주어 수십  문질러야만 겨우 하나가 지워졌다. 금방 끝날 거라 생각한 작업은 점점 미궁으로 빠졌다. 그래도 이미 발을 담갔는데 어쩌겠는가. 2시간 동안 수백 번의 문지름 끝에 전체 사물함 문짝이 어느 정도 깨끗한 얼굴로 바뀌었다. 비록  손목은 너덜너덜해졌지만. 그래도 깨끗한 사물함을 보니 기분이  좋아졌다. 아이들은 아마도 모르겠지. 그리고 나도 이야기하지는 않을 거다. 하지만  사물함의 변화는 내가 안다. 그리고 나의 마음이 가장 중요한 것이다.  마음을 어떻게 먹냐에 따라  해동안 아이들을 얼마나 사랑해줄지가 결정되기 때문이다. 그렇게 나는 사랑의 한 해를 시작하기 위한 나만의 의식을 조용히 치루었다.


사물함 닦기얼추 끝나갈  희영 선배에게 전화가 왔다.


"뭐야, 아직도 학교라고? 내가 학교에 충성하지 말라 했지! 얼른 집에 가, 얼른!"


다정한 희영 선배. 예전에 나와 3년을 함께 근무했을 때 희영 선배는 같은 학년에서 늘 나를 엄마처럼 돌봐줬다. 속상한 일에는 나보다 본인이 더 분노하고, 힘든 일을 겪을 때는 한참 마음을 써주었다. 그런 선배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의지했는데, 올해 우리 학교에서 희영 선배를 다시 만나는 행운을 얻었다. 친구들 사이에서 내 별명이 '다정도 병인양하여'인데, 희영 선배를 보면 '다정도 중병인양하여'라고 불러주고 싶다. 나보다 다정병이 더 중한 사람이다.


"너는 너무 착해서 문제야. 맨날 웃고 다니니까 남들이 너 힘든지 모르잖아. 나 죽는다 소리 자주 해. 알았지?


너무 착해서 문제인 희영 선배가 나에게 너무 착해서 문제라 한다. 매일 웃는 건 희영 선배인데, 나더러 그만 웃고 힘들다는 소리 자주 하라 한다. 못 산다, 정말. 희영 선배의 잔소리는 그 이후로 10분간 더 이어졌지만, 하나도 어렵지 않았다. '내가 너 많이 아끼는 거 알지. 나는 네가 참 좋아.'라는 말로 번역되어 들렸으니까.


다정은 병이 맞다. 그러나 참 행복한 병이다. 다정이 병인 사람들은 마찬가지로 다정이 중병인 사람들을 귀신 같이 알아보고, 서로에게 다정을 무차별적으로 쏟아 부어준다. 나는 넘치는 다정함을 쏟아부어줄 대상이 있는 교사라는 직업이 참 좋다. 그리고 그 다정함을 받을 존재가 어린 아이들이라는 것도. 다정함은 꼭 밥과 같아서 받으면 받을수록 점점 마음에 살이 차오른다. 우리 아이들의 마음을 통통하게 살찌우는 한 해를 보내고 싶다.


요즘 돈쭐을 내준다는 말이 유행이다. 좋아하는 가게를 많이 팔아준다는(돈을 많이 쓰겠다는) 의미이다. 그말을 들을 때마다 웃기다. 그말을 떠올리며 올해 우리 아이들을 좀 정쭐 내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주 내 다정함으로 넘치도록 혼쭐을(?) 내줘야겠다. 우리 아이들은 지금 모두 깊은 잠에 빠져 있겠지. 혼쭐날 줄도 모르고 쿨쿨 자고 있을 귀여운 얼굴을 떠올리는 밤이 참 설레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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