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빗소리 Mar 07. 2022

나의 목표는 건강히, 살아남는 것

# 쓰레기를 쓰겠어!


<미스 홍당무> 영화를 만든 이경미 감독의 책에 이런 대목이 나온다.


"쓰레기를 쓰겠어라고 결심하니 써지긴 써진다.

매일 다짐해야겠다. 쓰레기를 쓰겠어!"


이경미 감독의 작품들은 평론가들에게 독특한 매력으로 호평을 받는다고 알고 있는데, 그런 감독도 글을 쓰기 전에 얼마나 두려우면 쓰레기를 쓰겠다는 마음으로 발을 떼는지...... 그 문장 속에서 이경미 감독의 부담감과 압박이 느껴져서 절로 동감했다. 나 또한 매일 글을 쓰려 노트북에 앉을 때면 두려움에 덜덜 떨 때가 많은데, 이 문장을 꽉 틀어 쥐고 발을 떼 봐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솔직히 이야기하면 브런치에 있는 나의 글을 몽땅 삭제하고 싶은 충동에 꽤 자주 휩싸인다. 아마도 글을 쓰는 사람 대부분이 겪는 꽤 뿌리 깊은 충동일 거 같다.


두려움에서 시작된 회피 본능으로 오늘도 그냥 노트북을 덮고 잘까 하다가 이 문장에 힘입어 다시 다짐해본다.


"쓰레기라도 써보겠어!"


매일 무너지고 일어서는 이 반복, 이 용기가 내 삶에 분명 좋은 자양분이 될 거라 믿는다.




# 건강히, 살아남는 것


교무부장으로서의 첫 해를 시작했다. 엄청난 업무 압박에 시달릴 거란 예상 그대로 정말 상상 이상의 압박에 매일 시달린다. 주말 동안 만든 공문만 8개이다. 요 며칠 계속 두통에 시달리는데, 왜 그럴까 생각해보니 혹시라도 놓치고 있는 일이 있을까 봐 긴장하는 것이 원인인 것 같다.


올해 나의 목표는 교무부장을 잘 해내는 것이 아니라 건강하게 살아남는 것이다. 모두의 기대에 부응하고 싶지 않다. 사실 신입 교무부장의 역량을 기대할 사람도 많이는 없을 것 같다. 눈부시게 업무 성과를 올리기보다 그냥 구멍 안 날 정도로 매일 성실하게 할 일을 적당히 감당해내며 아프지 않고 건강하게 지내고 싶다. 아프지 않을 정도로 문제없이 적당히 일하는 것. 나는 그게 진짜 실력이라 생각한다. 나의 건강은 곧 내 자신, 가족, 친구들 모두의 행복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일주일 동안 소식을 전하지 못했던 친구들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나 건강히 살아 돌아왔어."


열정적으로 일하는 것보다 워라밸의 균형을 잃지 않으며 일하는 것이 더 어려운 일이다. 그 어려운 일을 올해 꼭 해내고 싶다.




# 3월의 우리 반은 춘추전국시대!


부산에서 전학생이 왔다. 새 학기 시작 전날, 얼굴도 모르는 전학생의 자리 배치를 고민하며, 학교 생활 적응을 위해서는 나와 가까이 앉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 제일 앞으로 배치했다. 다음 날 전학생인 서진이를 만났는데, 생각보다 말이 많아서 생활지도가 어려운 친구가 전학 왔나 짐짓 두려운 마음이 들었다. 서진이를 며칠 유심히 지켜보니 적극적이고 솔직한 것일 뿐 그리 쓸데없는 말을 하는 친구는 아니란 판단이 생겼다.


서진이는 용감하게도 우리 반 서열 1위로 추정되는 준이와 무려 3일 연속 몸싸움을 했다. 처음에는 말 몇 마디로 시작되는 녀석들의 싸움이 결국 발차기와 주먹으로 이어졌다. 준이와 서진이를 데려와서 몇 번 훈육을 했지만, 사실 마음속으로는 잘됐다 싶었다. 준이가 약한 친구를 괴롭히는 방식의 나쁜 리더십을 가진 아이라면 서진이는 좋은 리더십을 가진 아이였다. 준이에게 기울어져 있던 힘의 균형을 서진이가 맞추어 줄 거란 느낌이 들었다.


우리  여기저기서 치고 박는 소리가 들리고, 매일매일 녀석들의 싸움을 중재하는 중이지만. 나는  귀찮아도 괜찮으니 부디 녀석들의 춘추전국시대가 건강한 힘의 균형으로 자리를 잡고, 어서 요순시대를 맞이했으면 좋겠다.




# 아름다운 문장에 기대어


야근만은 피하고 싶었는데, 일이 한계치에 다다라서 결국 9시까지 야근을 하고 와야 했다. 큰 건물 안에 혼자 있는 건 무서운데, 일이 너무 많아 무서운 줄도 모르고 4시간을 홀린 듯 일했다.


나는 힘들면 힘들다 말 안 하는 나쁜 버릇이 있다. 징징거리는 거 딱 질색이라 그냥 버티고 만다. 그런 성향이다 보니 가끔 스스로도 힘들다는 걸 눈치채지 못할 때가 있다. 하루를 정리하며 서재에서 이 책 저 책 꺼내어 읽어 보는데, 한 그림책을 읽다가 왈칵 울어버렸다. 굽이치고 흐르는 강물의 고요함과 역동성, 아름다움을 노래한 문장이었는데, 그 문장이 참 예뻐서 내 마음을 만진 것이다. 순간 ‘아, 내가 지금 마음이 좀 힘들구나’라고 느꼈다. 마음이 힘든 날은 작은 문장 하나를 읽어도 유난히 진동이 크게 느껴진다. 그 진동에 내 마음을 기댄다. 세상에는 값나가지 않아도 내 마음을 이리도 위로해주는 것이 많다는 생각에 마음이 놓인다.


아름다운 문장 하나가 넘치도록 가슴에 출렁이는 날이 있다. 오늘이 그런 날이다. 내 마음이 힘든 날. 힘든 만큼 더 많이 위로 받는 날. 아름다운 문장에 기댈 수 있는 사람으로서 살 수 있어 감사하다.

매거진의 이전글 고작 그것이 삶의 전부가 되기도 한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