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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빗소리 Aug 12. 2022

희생을 하고 싶지도, 바라지도 않아

# 희생을 하고 싶지도, 바라지도 않아


모두의 시간은 다르다. 삶의 모양이 달라서이다. 미래를 알 수 없기에 지금 내 시기가 어떤 시기인지 잘 알 수 없지만, 피부로 느끼는 지금의 내 시기는 커리어적인 면에서는 꽤 중요한 시기 같다. 한참 일을 배우고 있고, 그릇을 키워가는 시기이다.


내 시기를 내 딸은 알리 없다. 내 딸에게 엄마는 그저 얼굴 마주치면 자신과 놀아줘야 할 존재일 뿐이다. 내 딸에게는 당연한 일이고, 요구해야 할 권리가 맞다. 문제는 놀아주면서도 해야 할 일을 머릿속에 재고 계산하는 내 마음이다.


아이에게 희생을 바라고 싶지 않고, 나 또한 언젠가 내가 널 위해 어떤 걸 희생했는데라는 대사를 날리는 엄마가 되고 싶지 않다. 아이가 내게 바라는 것과 내가 해야만 하는 일들 사이에서의 접점과 균형을 그저 계속 찾아갈 뿐이다. 사실 그 과정은 무척 고통스럽다. 죄책감에 우는 날들을 무수히 겪어가야 하기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딸을 위해 그 접점을 찾아내고 싶다. 물론 과연 그 접점은 현실에 존재하긴 하는 거냐는 질문이 늘 마음속에 있지만 말이다.


오늘도 놀아달라는 딸과 해결해야 할 학교일 사이에서 이리저리 왔다 갔다 하며 좌충우돌하는 하루를 보냈지만, 후회스럽진 않다. 무엇 하나 제대로 해낸 일은 없으나 적어도 무엇 하나 책임을 다하지 않은 일은 없으니까 말이다. 무언가를 잘 해내기보다 내가 책임져야 하는 일들에 마땅히 책임을 지는 사람으로 살아가고 싶다.




# 브런치병


신기하다. 글쓰기 싫어 도망 다닐 때는 언제이고, 진짜 글을 쓰지 않고는 도저히 못 참겠어라며 다시금 글쓰기를 한다. 브런치 기록을 보면 약 한 달 정도가 지나면 브런치병이(글쓰기병) 어김없이 도지는 것 같다.


머릿속 상념들을 문장이라는 줄로 엮어내는 것은 고통스러운 일이라 사실 글을 쓸 때마다 기쁨과 함께 고통을 겪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글쓰기는 포기할 수 없는 그 무엇이다. 나의 상념들이 시각화되는 유희를 도저히 포기할 수 없기 때문이다.


도망 다니더라도 좋으니 글쓰기는 포기하지 말자. 사람의 얼굴만큼이나 문장의 색깔은 다르다. 나의 색을 뚜렷이 브런치란 공간에 유지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 내가 좋아하는 아이보리(미색)처럼 잔잔하고 유약한 듯 하나 부드러움으로 마음을 감싸안는 문장을 쓰는 사람이고 싶다.



# 여름의 백수린


백수린 작가의 ‘여름의 빌라’를  읽고 있다. 나는 자극적인 이야기들을 좋아하지 않는다. 잔잔하고 섬세하면서도 아름다운 문장으로 표현되는 이야기들을 좋아하는데, 백수린 작가의 소설이 딱 그랬다.


 사건은 없어도 복잡 미묘한 인간의 심리를 섬세하게 묘사하는 부분에서 무척 매료되었다. 단편으로 구성된 책을 차례대로 읽지 않고, 마음이 닿는 대로 읽었는데 의외로 가장  부분에 실린 ‘시간의 궤적 읽은  마음이 무척 먹먹해졌다.


이야기 속에서 계속되는 파리의 물기를 가득 머금은 대기는 지금 내가 겪는 연이은 비의 시간과 딱 맞아떨어졌다. 그래서인지 작가가 그리는 이야기의 그림이 마음속에 선명히 펼쳐졌다.


시간의 궤적을 읽은 뒤 LP를 꺼내 정우의 목소리를 듣고 또 들었다. 창밖의 빗소리와 플라스틱 판을 긁는 턴테이블의 바늘 소리, 백수린 작가가 내게 남겨놓은 파리 어느 거리의 소리가 어우러졌다. 내가 듣고 있던 것은 음악이었을까, 이야기였을까.


백수린으로 인해 행복한 시간이었다. 이다지도 누군가의 마음을 그리 행복하게 만들  있다니. 작가는 정말 멋진 직업임에 틀림없다. 글쓰기를 포기하지 않을 이유가 분명히 있다.


나를 매료시켰던 그녀의 문장을 함께 나누어 본다.



언니의 마음, 견고하지만 연약하고, 부드럽지만 단호하며, 누구에게도 속박되고 싶지 않지만 그런 자신을 이해해줄 누군가를 갈망하던 언니의 마음속 모순들은 빛과 어둠처럼 일렁이며 언니를 특별하게 만들었고, 나는 그것을 아는 사람이 나뿐이라고 생각했다.

- 백수린, 여름의 빌라 중에서




# 그리고 정우


정우의 음악을 듣다 듣다 얼마 전 독립서점에서 흘끗 보고 다시 꽂아둔 정우의 정규 1집 LP가 생각이 났다. 절판되어 구하기 무척 어려운 LP라는데, LP를 사러 갔던 길이 아니라 그냥 지나쳤다.


워낙 스트리밍 음원이 발달한 시대에 살기에 음악을 듣는 것에 아쉬움은 없지만, 정말 좋아하는 앨범들은 LP 버전으로 듣고 싶은 마음이 있다. 강아솔의 LP를 오랜 고민 끝에 웃돈을 주고 중고로 산 이유이다.


욕심이란 건 얼마나 웃기는 녀석인가. 불과 5분 전까지만 해도 세상에 존재하지 않던 욕심이 갑자기 생겨나며 마음이 초조해졌다. 정우 1집 LP를 꼭 듣고 싶다는 마음이 들자 이미 팔렸으면 어쩌지 하는 걱정이 생겼다. 욕심은 걱정을 낳고, 걱정은 초조함을 부른다. 사장님께 전화를 드리니 이미 팔렸던 것 같다고 그래도 재고를 찾아보고 문자 주겠노라 하셨다. 기다리는 문자가 오지 않아 내 초조함은 점점 커졌지만, 그 마저도 시간이 계속 지나자 웃음이 났다. 언제부터 갖고 싶었다고! 사람의 욕심이란 게 참 우스웠다. 아마도 나와 인연이 없는 앨범인가 보다 하며 마음을 정돈하는데 저녁 즈음 재고가 있다는 문자를 받았다. 기쁨도 기쁨이었지만, 오랜 기다림 끝에 받은 문자라 더 좋았다. 내가 얼마나 정우의 목소리를 좋아하고 있는지 알게 된 시간이었으니까.


잔잔한 기타 선율 위에 얹은 정우의 목소리를 들으며  글을 쓴다. 마음이 일렁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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