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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감사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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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빗소리 Jan 02. 2023

[감사일기] 1월 1일

1. 엄마의 면회를 갈 때마다 사람이 죽어간다는 것이 이런 느낌이구나라는 것을 깨달아간다. 엄마는 말 그대로 정말 하루하루 죽어가고 있다. 출근하느라 삼일 만에 본 엄마는 놀랍도록 더 죽음의 그림자에 덮여 있었다. 푸르뎅뎅한 손과 누군가한테 맞아서 부어오른듯한 엄마의 눈을 보고 엉엉 울었다. 끊임없이 엄마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내가 엄마를 위해 해줄 수 있는 건 지금 이 순간 죽음의 문턱 앞에서 느끼는 두려움을 이겨내게 해 달라는 기도뿐이었다.


“엄마, 두려워하지 마. 엄마, 괜찮아.”

기도하면서 끊임없이 엄마를 응원했다. 그 문만 열면 하나님이 계시다고 계속 나아가라고.


주말 내내 병원 근처인 친정에 있다가 출근을 위해 오늘 밤 집으로 갔다. 그러나 엄마의 임종이 정말 임박한 것 같다는 이모의 연락을 받고 집에 간지 두 시간 만에 다시 친정으로 돌아왔다. 요즘 내 삶은 엉망진창이다. 체력과 시간의 소모가 엄청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엄마의 마지막 순간을 함께 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 본다. 언젠가 후회하지 않기 위해. 장거리를 운전할 수 있어 감사. 밥 성실히 먹고 영양제 챙겨 먹으며 체력을 유지하고 있어 감사.


2. 도무지 글 쓸 마음이 안 생기지만 일기를 쓰는 것이 얼마나 위로가 되는지, 기록이 얼마나 중요한지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며 다시금 펜을 잡는다. 언젠가 또 다른 힘든 시기를 만날 나를 위해 내 인생에서 가장 어둡고 힘든 시기의 이야기를 생생히 남겨둔다. 고통의

기록 속에서 알알히 박힌 보석을 미래의 내가 찾길 바란다.


3. 집으로 운전하는 길 내내 엉엉 울면서 갔다. 집이 비상사태이다 보니 항상 가족이나 친척들에 둘러 쌓여 있어 혼자 있는 시간이 부족한데, 온전히 혼자 있는 시간이 찾아오니 갑자기 막연한 슬픔과 우울이 몰려왔다. 엄마 없는 지금 이 현실이 꼭 비현실 같이 느껴졌고, 가슴이 너무 쓰라렸다. 엉엉 한참 울고 나니 멍해졌다. 이 슬픔의 끝을 잘 모르겠지만, 울고 싶을 땐 그냥 울고 슬플 때는 그냥 슬프자. 혼자 있을 시간이 있어 감사.


4. 슬프고 우울할 때마다 책을 읽는다. 문장 속에서 위로를 받는다. 나의 희로애락과 관계없이 책은 어떤 모양으로든 내게 꽉 찬 평안이 되어준다.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독서광 나의 아빠에게 너무나 감사하다. 아빠 덕택에 평생 탄탄한 취미를 얻었으니. 독서를 너무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읽는 기쁨을 진정으로 안다는  인생의 든든한 적금 같은 것이니까. 부디  기쁨을  딸에게  전달할  있었으면 싶다. 그런 의미에서 아빠는 하늘나라에서 지금의 나를 보며 기쁠까?


5. 친구가 나에게 엄마가 세상 고통에서 벗어나 천국에 가는 것은 감사한 일일 수도 있다 했다. 아버지 상을 당한 친구가 한 말이기에 더욱 와닿는다. 엄마가 더 이상 아픔 없고 고통 없는 곳으로 가서 감사하다. 그곳에서는 더 이상 가난하지 않아도 되고, 사람들에 대한 배신의 고통도 없겠지. 사랑스러운 엄마와 딱 어울리는 곳일 거다. 장문의 메시지에 나에 대한 마음을 가득 담아 보내준 친구의 깊은 마음에 감사.


6. 내신을 내지 않기로 했다. 4년 차라 써야겠다 생각했지만, 엄마 일로 너무 바빠서 어느 학교에 가야 할지 충분히 알아보지 못했다. 이렇게 아무 정보도 없는 상태에서 함부로 쓰는 건 위험할 거 같아 결국 내신을 포기했다. 동료들이 좋아하고 고마워해줬다. 나한테 티를 안내서 몰랐는데, 내가 내신을 쓴다고 밝힌 몇 주 전부터 여러 동료들이 슬퍼했다고 한다. 그래도 내가 가는 걸 슬퍼하는 사람이 있어 이 학교에서의 삶이

의미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23년의 내 목표는 여전히 비슷하다. 일보다 사람. 일은 구멍만 없이 해내고, 최대한 함께 일하는 선생님들이 교육 외의 일들에 시달리지 않도록 보호해줄 생각이다. 서로를 생각해주는 동료들이 있어 감사.


7. 엄마 일로 한 해를 돌아볼 틈도 없고, 새해를 계획해볼 틈도 없다. 그래도 22년의 나를 토닥토닥해주고 싶다. 첫 교무 생활이었고, 특별히 잘한 일은 없지만, 큰 사고 없이 한 해가 조용히 흐른 것 자체가 너무 감사한 일이다. 그저 그런 교무, 그저 그런 엄마였지만 그래도 한 해를 뚜벅뚜벅 걸어오게 하신 하나님 은혜에 감사하다.


8. 우리 반 최고 장난꾸러기 엄마에게 한 해동안 감사했다는 연락을 받았다. 뿌듯했다. 감사하다.


9. 엄마의 소식이 올까 싶어 자지 않고 새벽 12시까지 기다리는 버릇이 생겼다. 언제쯤 나는 편히 잠들 수 있을까. 오늘도 잔뜩 긴장되는 마음으로 외출복을 입고 잠이 든다. 그래도 아직 엄마의 따뜻한 손을 만질 수 있음에 감사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 보면서. 내려갈 대로 내려간 혈압, 몸 곳곳에 보이는 푸른 흔적들, 불안정한 맥박. 엄마의 바이탈 싸인 모든 곳에서 불안함이 흐른다. 엄마가 세상에 있음에 감사하면서도 엄마가 저세상으로 떠날까 불안한 시간. 영원히 잊지 못할 시간들이다. 이 시간을 열심히 견딘 내게, 견딜 수 있도록 도우신 하나님께 언젠가 감사한 날들이 오겠지.


10. 엄마의 죽음조차 하나님의 섭리에 맡길 수 있어 감사하다. 엄마는 아주 오랜 기간 동안 내게 믿음의 씨앗을 뿌리내리게 도와주셨다. 우리 모두 그분의 섭리 안에 있다.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룰 것을 안다. 부모를 모두 잃은 지금의 내 아픔은 언젠가 비슷한 아픔을 지닌 누군가에게 이정표가 되어줄 것이다. 좋은 이정표가 되기 위해 많이 슬퍼하고 울며 건강하게 이 시간을 보내자 생각한다.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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