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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감사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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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빗소리 Jan 23. 2023

1월 23일 (월) 감사의 기록

책장 속에 마음을 숨기다

1. 엄마 장례 이후 맞는 첫 명절입니다. 더 이상 내게 친정이 없다는 사실에 채 적응하기도 전에 명절을 금세 맞았습니다. 엄마 사후 정리해야 할 일들과 학교에서 교무부장으로서 반드시 해야 하는 새 학기 준비 등 해야 할 일이 너무나 산재해 있어 고요히 슬픔에 집중하기가 힘이 듭니다. 저는 생각의 흐름이 천천히 흘러가는 편인데, 슬픔 또한 혼자만의 시간을 갖고 골똘히 생각해야 온전한 슬픔을 조금씩 감당할 수 있습니다. 아쉽지만 모든 일에는 때가 있기에 지금 해야 할 일들과 슬픔을 받아들이기 모두 균형을 맞추어야겠습니다. 항상 스스로의 마음 상태에 주의를 기울이고 관심이 많은 자신이라 감사합니다.


2. 이번 명절까지만 엄마 집에 모든 외가 식구가 모여 명절을 보내기로 했습니다. 그동안 엄마가 장녀로서 감당했던 짐을 이번에는 제가 감당해 보았습니다. 삼촌 가족들이 드실 음식을 미리 사서 준비하고, 데치고 끓이며 한상을 차렸습니다. 직접 음식을 한 게 아닌데도 신경 써야 할 일들이 많아 상당히 귀찮았지만, 외숙모들이 명절 음식을 하지 않아 엄마의 손길이 아니면 설음식을 드실 없는 외할머니께 설명절 음식상을 엄마 대신 차려드리고 싶었습니다. 엄마가 정말 좋아하실 것 같습니다. 엄마를 위한 효도를 잘 마무리할 수 있어 다행입니다. 감사합니다.


3. 엄마 사후 정리해야 할 금융 관련 일들이 있습니다. 큰삼촌께서 내내 신경 써주시고 금전적으로 힘들면 언제든 도와주겠다 하십니다. 참 감사한 일입니다. 정직하고 든든한 어른이 제 핏줄로 남아 있음에 감사합니다.


4. 큰삼촌과 이모께 감사한 일이 있어 요새 유명하다는 비타민계의 에르메스(?) 제품 선물 준비를 하다가 막내 삼촌께도 보냈습니다. 엄마께서 동생들에게 보내는 선물이란 마음으로 보냈습니다. 가격이 상당했지만, 엄마의 동생분들을 엄마 살아계실 때처럼 살뜰히 챙길 수 있는 경제적 여유가 있음에 감사합니다. 엄마가 정말 좋아하실 거 같습니다.


5. 사촌 동생 홍진이(가명)는 마음 길이 깊은 아이입니다. 항상 모든 것에 애잔한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홍진이는 호두가 섬세하고 선한 마음을 가졌다는 걸 금방 눈치채주었고, 호두를 매번 깔깔거리게 만들며 혼신을 다해 놀아주었습니다. 홍진이에게 참 감사합니다. 집에 가는 길에 홍진이의 호주머니에 가만히 함께 손을 넣고 몰래 용돈을 쥐어 주었습니다. 홍진이는 당황했지만 이모 모르게 그냥 받으라는 제 무언의 제스처를 잘 알아듣고 조용히 했습니다. (부모 모르는 비자금은 항상 중요한 것이기에) 홍진이가 제 사촌동생이라 감사하고, 제가 홍진이에게 감사 표현을 할 수 있어 감사합니다. 작은 것에도 마음 아파하고, 소소한 것에도 기뻐하는 어른으로 잘 자라준 동생 홍진이가 있어 참 좋습니다.


6. 어젯밤 11시에 가까운 대도시 아이맥스관에서 아바타 2를 봤습니다. 새벽 3시나 되어서야 집으로 돌아오는 여정이었지만, 평상시에는 정말 시간이 1도 안나는 제 생활이기에 이번이 마지막 기회인 것을 직감하고 과감하게 아이를 이모에게 맡기고 영화관으로 달려갔습니다. 늘 새로운 세계에 대한 호기심과 모험심이 큰 저에게는 거대한 대양을 imax의 웅장한 화면에 가득 펼쳐 놓은 영화를 바라보는 것이 꿈같았습니다. 현존하는 영화 기술의 최고봉만 모아놓은 영화, 제작비가 수천억 대를 넘나드는 영화. 그래픽 기술자들에게는 꿈의 직장을 선사한다는(왜냐하면 제작사들이 제작비가 얼마나 많이 드는지를 따지지 않고, 원하는 작업을 원 없이 할 수 있어서랍니다.) 영화. 지독한 완벽주의자(제임스 카메론 감독)의 영화. 3시간짜리 영화를 보는데도 하나도 지루하지 않았습니다. 2천 명이 넘는 사람들이 만든 최선의 결과가 놀라웠습니다. 좋아하는 영화를 보며 즐거운 시간을 가질 수 있어 감사합니다.


7. 큰소리로 울고 힘들어하는 엄마의 주변 사람들과 달리 딸로서 제가 겪는 슬픔은 저의 일상 속에서 잔잔히 순간순간 견뎌야 하는 슬픔입니다. 직장 안에서 생각보다 너무 멀쩡히(?) 살아가는 제 모습이 누군가에게 이상하게 보이지는 않을는지 다소 걱정했고, 이런 고민을 친구에게 나누었는데, 친구가 네가 일상생활을 잘 해내려 애쓴다 생각하지 이상하다 생각하진 않을 거라며 위로해 주었습니다.


내성적인 제게 있어 슬픔을 이겨내는 방식은 홀로 고요히 그 슬픔들을 받아들이고 집중하고 흘려보내는 것입니다. 사람들 앞에 제 슬픔을 드러내는 일은 제게 낯설고 힘든 일입니다. 그렇다고 연기를 하며 살아가고 있지는 않습니다. 그냥 원래 성격 자체가 슬픔을 온전히 혼자일 때까지 아껴두는 성격 같습니다.


낮에는 씩씩한 모습으로 살아가고 밤에는 슬픔의 옆얼굴을 물끄러미 응시합니다. 그래서 밤의 시간이 참 힘듭니다. 기도하며 하나님께 기대게 하소서. 잘 기도하지 않고 잘 말씀 읽지 않으며 요새 모든 것에 소원해진 저이지만, 이상하게도 하나님 생각은 24시간 합니다. 제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하나님께서 계시기에 감사합니다.


8. 엄마 일을 겪은  호두에 대한 생각 오직 하나, 그저 세상에 존재해 줘서 고맙다는 마음 하나입니다.  어떤 것이 잘나서가 아닙니다. 그냥 세상에 존재해 주는  자체가 너무 고맙습니다. 우리 몸이 숨이 끊기는 순간 우린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지요. 그저  줌의 가루가 되어버리는 인생을 너무 아글타글 살아가는  아닌지 생각이 듭니다. 호두가 그저  쉬어주어 고맙다는 지금의 마음을  간직하게 하시고, 이제 제가 살면서 겪을 수많은 이별이 있을 테지만, 천국에서 다시 만난다는 소망으로 꿋꿋하게 안녕을 감당하게  주세요. 감사합니다.


9. 엄마의 장례식이 너무 급하게 경황없이 치러져서 몇 주에 걸쳐 부의금을 전달받았습니다. 불과 어제까지도 말입니다. 이미 장례식이 끝났는데도 상심에 젖을 저를 위해 늦게라도 꿋꿋이 마음을 전해주는 그 따뜻함들에 감사합니다. 저와 연결고리가 별로 없는 경우인데도 부모를 모두 잃은 제가 너무 아프게 느껴져서 저에게 큰 부의를 하는 분들도 종종 있었습니다. 우리는 모두 연결되어 있고, 돈이란 게 참 복잡한 물질이지만, 때론 사람의 마음을 전하는 좋은 매개체가 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 또한 적절한 순간에 지혜롭게 돈을 지출하며 저의 온기를 정하는 사람이 되자 생각했습니다. 많은 이의 온기로 현재의 힘든 상황을 조금씩 버텨갈 수 있음에 감사합니다.


10. 부모가 없다는 것, 온전히 저를 내려놓고 마음 비빌 곳이 하나도 없다는 것을 서서히 체감하는 날들입니다. 죽기 전까지 이 서늘함은 나를 어떤 방식으로 힘들게 할까요? 두렵지만, 호두에게만은 이 서늘함을 절대 느끼게 하고 싶지 않다는 마음입니다. 하나님, 부모님처럼 일찍 가지 않게 해 주세요. 호두가 온전히 마음의 독립을 할 때까지 제가 건강하게 해 주세요.


11. 저는 잘 놀아주는 엄마가 아닙니다. 체력이 없고, 지쳐있을 때가 많아 호두가 원하는 만큼 잘 못 놀아줍니다. 그리고 마음이 힘이 들면 짜증을 내기도 합니다. 그러나 저는 호두에게 제가 가진 모든 사랑을 온전히 표현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호두가 저로부터 따뜻한 사랑을 받고 늘 배부르도록 애씁니다. 덕분에 호두의 마음이 배고플 때가 자주 없다 생각이 듭니다. 놀아줄 능력이 없음에 스스로 무력감과 죄책감을 자주 느끼지만, 이렇게 그 죄책감을 나름대로 방어하며 살아갑니다. 제가 엄마로서 너무 어두운 마음으로만 살지 않아 감사합니다.


12. 방학이어도 한 번도 출근을 하지 않은 날이 없이 바쁩니다. 12~1월 동안 밀린 일로 어쩌면 학기 중보다 더 바쁘게 지냅니다. 그러나 방학이어서 좋은 점은 수업의 부담이 없어지다 보니 제가 좋아하는 독서를 종종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도 힘든 마음을 문장 사이에 숨겼습니다. 좋아하는 작가인 천선란의 문장들을 천천히 씹고 음미하며 잠시나마 충만한 행복을 느꼈습니다. 문장 안에서 제가 안식할 수 있어 감사합니다. 문장 사이에 힘든 마음을 숨길 수 있어 감사합니다.


1월 16일(월)

1. 엄마와의 이별 후 마음이 많이 힘든 상태였지만, 장례 절차 이후에도 수많은 일들이 산재해 있어 하나씩 해결하기도 참 벅찹니다. 엄마 사후에 제가 정리해 나가야 할 일, 학교 일, 집안일 모든 것이 산적해 있는 상황이라 버겁지만, 하루하루만 바라보며 아주 조금씩만 해냅니다. 시간은 지날 것이고, 일들은 조금씩 줄어들어갈 것입니다. 제 자신을 위해 천천히 조금씩만 해결하려는 마음 주시는 하나님 감사합니다.


2. 감사일기를 쓰려 여러 번 시도했지만 스스로 일어서기가 쉽지 않은 시간이었습니다. 지금도 엄마가 돌아가셨다는 사실 자체가 믿을 수 없어 하루에도 몇 번씩 허망함과 좌절감이 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을 포기하지 않고 붙잡게 하시는 은혜 감사합니다.


3. 엄마로 인한 상실감과 달리 작은 몸의 호두가 주는 충만함이 큽니다. 종알종알 말하고 작은 엉덩이를 이리저리 흔드는 호두가 참 귀엽고, 이렇게 귀여운 목소리, 어린 얼굴의 호두의 시간이 쏜살 같이 흘러가서 아쉬운 시간들입니다. 이 작은 생명이 태어나 저에게 큰 기쁨을 주니 참 감사한 일입니다.


4. 고아의 마음을 알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엄마, 아빠 없이 살아간다는 게 마흔의 나이에도 힘이 드는데, 태어나서부터, 어려서부터 고아인 아이들의 마음은 어떨지 생각하니 참담합니다. 엄마의 장례식 부의금 중 일부를 보육원 퇴소 후 자립을 준비하는 청년들을 위한 사업에 기부했습니다. 보육원 아이들과 자립 준비 청년들에게 시선을 두게 하시고, 그들을 위해 기도하고 후원할 수 있길 소망합니다.


5. 엄마의 죽음을 느끼는 감정은 드러나는 큰 슬픔이 아니라 하루에도 몇 번씩 순간순간 맞닥뜨리는 추억으로 인한 통증, 비슷한 연배의 어른을 볼 때의 저릿함으로 다가옵니다. 저는 오래도록 이렇게 살아가야 하겠지요. 그리고 아마도 살아가는 내내 이렇게 살아야 하겠지요. 그런 생각을 하면 삶이 한없이 무섭게 느껴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가야 합니다. 한 아이의 삶이 제 앞에 놓여있으니까요. 그 아이를 제대로 된 어른으로 키우는 것이 제 남은 삶의 소명임을 압니다. 부디 그 소명을 완수할 때까지는 이 아이 곁에서 건강히 살아야겠다 생각이 듭니다. 우리 엄마가 그랬듯. 엄마가 걸어온 너무 힘든 길을 저 또한 걸어갑니다. 마흔 하나에 과부가 되시고, 수없이 세상으로 인해 상처받고 울었을 엄마를 생각하니 가슴이 미어지지만, 그때의 엄마를 생각하며 저도 꿋꿋하게 세상 속으로 걸어 들어갑니다. 엄마의 딸로서, 호두의 엄마로서 담담하게 제게 남겨진 삶을 살아가고 싶습니다. 혼자가 아니라 하나님이 계셔서 다행입니다. 감사합니다. 힘든 길이라 해도 피하지 않겠습니다.


6. 좋아하는 은유 작가가 글쓰기 책을 7년 만에 냈습니다. 저도 모르고 있던 사실을 친구가 먼저 알고 선물해 주었습니다. 바빠서 아침에 잠시 잠깐 몇 구절만 읽었는데도 참 좋았습니다. 제게 은유 작가는 무림계의 숨은 고수 같이 느껴지는 존재입니다. 좋은 작가의 좋은 문장을 살면서 만날 수 있어 참 감사합니다.


7. 제자 강이가 한 해 동안 얼마나 제 속을 썩였는지를 나열하자면 수없이 많은 종이를 채울 수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강이가 처한 집안 환경이 참 슬프고 안쓰럽습니다. 금요일에 돌봄 교실에 있던 일로 강이는 여러 어려움을 겪어야 합니다. 저 또한 그 일을 해결하기 위해 오늘 많은 통화를 하고 애를 썼지만 쉽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강이에게 은혜를 베푸셔서 부디 강이의 미래가 어둡지 않길 바랍니다. 가정환경의 어려움을 극복하고 강이가 멋진 청년으로 자라나길 기도합니다. 하나님, 강이를 보살펴주세요. 그래도 하나님이 계시기에 강이의 미래를 조금은 밝게 생각해 봅니다. 다행입니다. 강이의 일로 겪는 담임교사로서의 제 어려움과 힘듦도 분명 가치가 있는 것이겠지요. 무시하고 싶은 비열한 이들에게 사과하고, 자존심을 꺾어봅니다. 지키기 위한 사람을 위해서 하는 그러한 일들은 부끄러운 일이 아닙니다. 강이를 지키기 위해 저는 용기를 내봅니다. 강이를 지키는 일은 가치 있는 일입니다. 그렇게 믿고 힘든 하루를 버텨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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