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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감사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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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빗소리 Apr 07. 2023

4월 6일 (목) 감사일기

1. 얼마 전에 교사 밴드의 여성 보컬을 구한다는 메일을 읽었다. 그 밴드는 이미 남성 메인 보컬이 있는 밴드로서 작년에 공연하는 것도 보았기에 새로 구한다면 서브 보컬 정도일 거란 생각이 들었다. 재미있네라며 넘긴 메일이 저녁 내내 생각이 났다. 밤까지 고민하다가 양치질을 하며 결심했다. 할머니가 될 때 엄청 즐거워할만한 추억 하나는 만들겠노라고. 그리고 오랫동안 내 안에 숨겨져 있던 작은 버킷리스트가 있었는데, 바로 밴드의 보컬로 서보는 것이었다. 겁도 없이 답메일을 적어내려 갔다. 막 고음이 올라가고 파워풀한 보컬은 아니지만, 좋은 음색을 가졌다 생각하므로 곡 1곡 정도는 부르고 싶다고. 하지만 내일 아침이면 왠지 후회할 메일 같아서 좀 걱정이 된다며 솔직하게 글을 보냈다. 밴드 담당자 선생님은 내가 바로 취소할까 걱정이 되었는지 이른 아침에 황급히 답메일을 보내주었다. 환영한다고.


그렇게 나는 얼떨결에 밴드 보컬이 되었다. 사건의 지평선이란 곡을 받고 과연 내가 이것을 할 수 있을까 엄청 고민하며 첫 연습에 갔다. 고음과 함께 기교가 많은 곡이라 당연히 안될 거라 걱정했는데, 역시나 잘 안되었다. 밴드에서도 당황한 거 같았다. 순간 밴드를 탈퇴하고 싶었지만, 왠지 번복하는 것이 가벼운 사람인 거 같아 참았다. 밴드의 멤버들은 당황함을 얼른 수습하고 나에게 맞는 곡을 찾아주겠다고 친절하게 이야기해 주었다. 함께 찾다 보니 옥상달빛, 제이레빗, 백아의 곡이 후보로 올라왔다. 나도 마침 좋아하는 곡들이고, 나의 목소리와도 잘 어울리는 곡들이라 즐겁게 골랐다.


옥상달빛의 달리기를 열심히 연습해 간 두 번째 연습은 첫 번째와 비교할 때 훨씬 나았다. 이번에는 나도 욕심을 버리고 조금은 가볍고 부드러운 방식으로 노래를 불렀는데, 이번에는 밴드의 멤버들이 좋아했다. 이전에 가수 심규선의 에세이를 읽은 것이 생각이 났다. 파워풀한 음악을 부르고 싶지만, 자신은 아예 그런 것이 안 되는 스타일이니 중저음의 목소리로 높지 않은 음악들을 불렀고, 그런 스타일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생기다 보니 가수로서의 삶을 계속 살아올 수 있었노라고. 나 또한 나만의 방식으로 보컬로서의 삶을 살아봐야겠단 생각이 들었다.


남 앞에 서는 것은 참 부끄러운 일이지만, 노래를 부르는 그 순간만큼은 음악과 나만 있는 거 같아서 왠지 좋다. 이상한 일이다. 그 이상한 일에 도전하고 있는 이상한 내가 좋다.


2. 교감선생님과의 대화는 언제나 즐겁다. 교감선생님도 나도 은근히 내향적인 성향을 가진 사람이라 속내를 잘 드러내지 않지만, 둘이 있을 때는 가감 없이 속내를 드러낸다. 무엇보다 나와 유머 코드가 맞는 상사를 모시고 있다는 것이 얼마나 즐거운 일인지를 내가 처음으로 깨닫고 있어 참 좋다. 내가 밴드 보컬을 자원했다는 이야기에 교감선생님께서 육성으로 꺄하하하하하하하고 웃으셨다. 이게 비웃음인지 분간이 가지 않았으나 나는 교감선생님이 내 앞에서 숨기지 않고 웃으시는 게 참 좋았다. 나도 같이 꺄하하하하하고 웃어버렸다. 하고 싶은 일이 너무 많은 교장선생님과 일하느라 교감선생님도 나도 삶이 좀 퍽퍽하긴 하지만, 그래도 둘이서 함께 크고 작은 파도를 넘나들며 우정이 생겨나고 있다. 나는 교감선생님이 진심으로 좋다. 함께 우정을 나눌 수 있는 사람과 일해서 다행이다.


3. 여전히 미친 듯이 바쁜 해를 살고 있지만, 교감선생님께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저것 배우는 삶을 살라고 하셨다. 아직도 교직생활이 많이 남아있다며…. 그 교직생활에 써먹을만한 양식들이 내 안에 많이 있어야 한다고 하셨다. 그래서 나는 끊임없이 책을 읽고, 보고서 대회를 나가고, 연구를 하며 살아간다. 가뜩이나 정신없는 삶이 더 정신없지만, 일에 치여 살기보다 내가 정작 공부해야 할 것들을 놓치지 않으며 실력 있는 사람으로 늙어가고 싶다. 너무 바쁘니까 나름대로 살아갈 잔머리도 점점 생겨난다. 아직 난 40대 초반이다. 겁내기보다 더 도전하고 더 많이 실패하는 삶을 살아보자고 또 다짐해 본다. 아직은 실패를 감당할 수 있는 나이이기에.


4. 일을 많이 하다 보니 타자를 많이 치게 되고, 타자를 많이 치다 보니 타자 속도가 정말 많이 올라갔다. 언젠가 다다다다다다다 타자를 치고 있는데, 우리 반 1학년 아가들이 응? 이게 무슨 소리지? 하면서 어리둥절해 했다. 그 모습이 너무 귀여워서 생각날 때마다 웃음이 난다. 어차피 퇴직할 때까지는 열심히 타자를 쳐야 하는 인생인데 타자 속도가 올라가니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내가 아직 젊고 빠른 손을 가져서 감사하다. 이 빠른 손으로 내 일만이 아니라 남의 일도 조금씩 도와주는 삶을 살아보자.


5. 사랑하는 서영 선배가 바로 옆반이다. 내가 즐겨 먹는 액상 비타민을 드리려 잠깐 교실에 들렀는데, 안 계시다. 실망하다가 좋은 아이디어가 생각나서 포스트잇에 빨갛게 하트를 그리고 그 안에 비타민을 놓고 왔다. 나라는 표식도 없이. 몇 십분 뒤 서영 선생님에게 눈물 흘리는 이모티콘이 왔다. 그 비타민을 즐겨 먹는 사람이 나란 것을 아는 서영샘이 금방 나의 표식임을 알아챈 것이다. 서로 수다 떨 시간도 부족한 시골학교의 삶이지만, 작은 정을 나눌 아이디어가 있으니 얼마나 감사한지. 서영샘이 세상에 존재해서 감사하고, 서영샘 가까이에서 일해서 참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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