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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감사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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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빗소리 May 10. 2023

5월 10일 (수) 감사 일기

1. 오늘의 소중한 기억들이 금방 휘발될까봐 조금은 초조한 마음으로 집에 도착하자마자 감사의 소회를 황급히 적어나간다.


나의 노래 실력을 내 스스로 생각할 때, 가창력이 그렇게 뛰어나지는 않지만 나름대로 목소리가 매력적이란 생각을 했다. 특히 가성을 낼 때 부드럽고 청아한 음색이 있다 생각했고, 그 부분을 다른 이들에게 어필할 수 있다 여겼다. 나름의 생각이 있었기에 밴드 보컬에도 도전한 것이었다. 그러나 나의 첫 도전은 실패로 끝이 났다. 사실 꽤 처참했다.


밴드 멤버들과의 첫 만남 날, 나는 연습 시간을 완전히 착각하여 지각을 했고, 도착한지 10분 정도만에 급하게 첫 곡을 선보여야했다. 당시 내가 선보여야 했던 곡은 난이도가 높은 ‘사건의 지평선’이었고, 오랜만에 남들 앞에서 부르는 노래라는 생각에 바짝 긴장했다. 여러 가지 악재가 겹쳐 결국 노래를 완전히 망해버렸고, 밴드 멤버들은 적잖이 당황했다. 어렵게 뽑은 여성 보컬 멤버의 노래 실력이 엉망이었으니까. 결국 대부분의 라인업에서 내 노래는 빠졌고, 난이도가 상당히 쉬운 1곡만 내 차지가 되었다. 그날 집에 돌아가면서 차 안에서 계속 눈물이 났다. 너무 창피해서 쥐구멍으로 숨고 싶었고, 지금 당장 전화해서 밴드를 그만두고 싶었다. 내 나름대로는 자신 있는 부분이 있었는데, 그런 면은 하나도 보여주지 못한 것 같아 아쉽고 속상했다.


책임감이 있기에 마음만큼 금방 그만두진 못했다. 마음에 조금의 오기도 생겼다. 반드시 내가 잘할 수도 있다는 것을 증명하리라.


때는 좀처럼 오지 않았고, 우리 학교에서 한 첫 공연도 사실상 그리 성공적이진 못했다. 첫 공연이라 너무 긴장했고, 당시 목감기가 낫지 않아 목소리도 엉망이었다. 계속되는 실망감 속에 마음이 어려웠지만, 일년은 해보기로 마음 먹었기에 목 컨디션을 잘 조절하면서 연습만 줄기차게 할뿐이었다.


시간은 가고 드디어 기회는 왔다. 피프티피프티의 큐피드. 처음 듣자마자 메인 멜로디 부분이 내 귓가에 쏙 들어왔고, 나처럼 가성을 주로 쓰는 메인 보컬의 음색이 나와 잘 어울리겠단 생각이 들었다. 말을 빨리 하는 것도 자신 있기에 상당히 빠른 템포의 랩도 연습만 하면 충분히 소화할 자신이 있었다. 내가 매력을 발산할 수 있는 곡이 있다는 것을 밴드 멤버들에게 증명하자는 마음으로 매일 시간이 날 때마다 계속 연습했다. 출퇴근할 때마다 노래를 부르고, 집에서도 앉으나 서나 계속 연습을 했다.


오늘, 드디어 밴드 연습날. 그동안 귀에 인이 박히도록 듣고 연습했던 곡을 펼쳐냈고, 밴드 멤버들은 뺄까말까 고민스러웠던 큐피드를 라인업에 넣기로 결정했다. 밴드 멤버들의 평가에 통과한 것이다. 다음 공연을 들을 아이들이 정말 좋아하겠단 칭찬도 해주었다.


무엇을 하던 슬로우 스타터인 내게 첫 시작은 언제나 고통스럽다. 항상 부족함에서부터 시작해야 하는 일련의 과정들이 힘이 든다. 그러나 차츰차츰 나만의 맥락을 빌드업해가며 사람들에게 나란 사람에 대해 조금씩 믿음을 갖게 하는 과정들은 나를 점점 도전하게 만든다. 오늘처럼 도전이 성공하는 날은 말할 수 없는 기쁨이 있다.


삶의 성취는 꼭 계단과 같아서 대부분의 시간들은 힘들고 지루한 날들인 것 같다. 그렇지만 오늘 같은 작은 성공들이 있기에 그 지루함의 수평선을 견딜 힘이 있다.


내게 아무런 압력도 주지 않았던, 그렇다고 큰 기대를 하지 않았던 밴드 멤버들에게 고마운 마음이 든다. 그 불편함 없는 분위기들이 오히려 나 자신과의 싸움에 더 전념하게 만들었다.


누군가의 찬사가 아니어도 이미 스스로 마음이 충만하다. 스스로 도전하고, 스스로 성취하는 기쁨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다.


2. 나는 요즘 정말 다양한 분야에 도전을 하고 있다. 어제까지는 한 번도 생각지 못한 일들을 오늘 벌이고, 준비가 안되었어도 그냥 해보면서 몸으로 부딪혀나가고 있다. 항상 시간 없이 바쁘기에 뭘 준비할 수도 없다. 그저 하루하루 맨몸으로 부딪힐 뿐이다.


40대가 되면 무언가 안정적인 성공을 이룩해야 한다 생각했는데, 현실은 여전히 20대처럼 끊임 없는 도전과 탐색을 이어가는 중이다. 다행인 건 매일 도전과 탐색이 반복되다보니 새로운 것들에 대한 두려움이 적고, 도전을 해나가는 과정이 학습되다보니 어떤 분야를 시작하건 나름의 시작과 끝을 상상할 수 있고 계획을 머릿 속에 그릴 수 있다.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인생은 길고, 나는 여전히 어리숙하다. 아직 10년은 더 헤매고 배우며 많이 머릿 속과 근육 속에 여러 가지 삶의 지혜들을 축적해나가야 할 거 같다. 몸으로 부딪혀가면서.


반복되는 도전 속에서 내가 도전을 두려워하지 않는 마음으로 커나가고 있어 감사. 일단 부딪혀보면서 알려 하는 부지런함과 맷집을 길러주심 감사.


3. 육아도 마찬가지이다. 무엇이 좋은 엄마인지는 전혀 알 수 없고, 내가 좋은 엄마의 깜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 생각하지 않지만, 본질이 가장 중요하다 생각한다. 온전하게 사랑 받은 기억, 공동체와 각 개인을 존중하는 태도를 위한 세세한 기술, 내가 잘하고 즐거워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정확한 눈. 육아에서 가장 중요한 것들은 이런 것들이 아닐까. 지겹고 힘들어도 나는 그러한 기술과 능력, 사랑을 아이에게 세세히 가르쳐야 할 필요가 있고, 이것은 인생 전체를 아우르는 길고 긴 여정이 될 것이다. 힘들고 지쳐도 끝까지 가면 분명히 어떻게든 이루어내는 것들이 있겠지. 내 딸의 인생을 든든히 밀어주고 싶다. 힘을 내자. 감사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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