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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빗소리 May 14. 2023

단무지 좋아해?

내 마음의 햇살


어제 저녁에 우연히 서영 언니네 텃밭에 놀러 갔습니다. 지인의 피로연에서 서영 언니를 만났다가 충동적으로 따라간 터라 텃밭 위에 뾰족구두와 정장 차림으로 우스꽝스럽게 서있었습니다.


조그만 밭뙈기란 말은 처음부터 믿으면 안되었는데. 커다란 대지 위에 없는 종류 없이 심겨진 것 같은 채소들을 보며 입이 떡 벌어졌습니다. 비닐하우스에는 씨앗을 심어 키운 아기 채소들이 밭에 나갈 날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멀리서 개구리 소리가 정겹게 울려 퍼졌습니다.


고대하는 순간. 개구리 소리가 동심원을 그리며 저녁을 채우는 시간은 제가 참 사랑하는 계절의 시간입니다. 사계절을 모두 동등하게 기다리며 앓이를 하기에 사랑하는 시간이 여럿 있긴 하지만요.


“아욱 좀 가져가. 상추는 안 필요해? 시간나면 퇴근할 때 와서 대파 좀 뽑아가다 먹어.”


바빠서 장도 겨우 봐다가 먹는 저의 냉장고에 그

귀한 야채들이 갇혀 지내게 될까봐 한사코 손사레를 쳤습니다. 어떤 마음으로 식물들을 돌보는지 알고 있기에 더욱 그렇습니다.


서영 언니는 그런 사람입니다. 식물이든 사람이든 자기 눈앞에 있는 것에 온 마음을 쏟는 사람. 지금으로부터 13년 전인 2011년 2월, 아직 신규티를 못 벗은 내가 새로 옮긴 학교의 옆반 문을 열던 때. 그 문 뒤에 저를 오래도록 품어줄 서영 언니가 있다는 사실을

그때는 감히 상상도 못했겠죠. 삶은 알 수 없고, 소중한 인연은 우연히 만난다는 걸 깨닫습니다.


엄마가 돌아가신 겨울에 몸보다 마음이 추워 늘 덜덜 떨며 다니는 나를 보며 서영 언니는 자주 울었습니다. 저와 함께 새학기를 맞이해 교실을 열심히 치워주기도 했습니다. 교실 청소는 얼마나 어렵고 귀찮은 일인지요. 그 어려운 일에 주저 없이 뛰어드는 언니

마음을 생각하면 언제든 마음에 햇살이 비춥니다.


언니의 밭에 서서 아기 채소를, 개구리 소리를, 언니의 마음을 온전히 느껴봅니다. 모두가 나에게 무언가를 요구하는 세상에서 잠시 벗어나 고요 속에 머뭅니다. 언니가 있어서, 그리고 언니가 사랑하는 자연들도 함께 있어 마음이 출렁이는 밤이었습니다.



모든 것은 빛난다


삶이 언제, 어느 때나, 늘 의미로 충만한 것은 아닙니다. 다만 우리의 삶이 성스러워지는 순간은 분명히 존재하며, 그 순간을 어떻게 삶 전체로 확장할지는 각자의 몫입니다.


        - ‘모든 것이 빛난다: 삶이 성스러워지는 순간은 분명 존재한다’ 롱블랙 노트 중에서


매일 아침마다 주어지는 24시간의 무게는 나이가 들수록 나이만큼이나 무겁게 느껴집니다. 엄마가 되고, 학교에서도 점점 중견교사가 되어 가니 어느 곳에서든 제가 할 일이 무거워집니다. 그에 비례해 삶의 고단함도 더해갑니다.


독서는 재해석이 더 중요하지요. 아무리 텍스트가 좋아도 그 텍스트를 독자가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독서의 질은 달라집니다. 삶 또한 그렇다는 생각이 자주 듭니다. 주어진 현실보다 재해석이 중요하다는 것을요.


책 ‘모든 것이 빛난다’에서 허무와 무기력이 삶을 압도하는 시대 속에 살아가는 방법은 삶의 감사를 되찾는 것이라 합니다. 커피 한 잔을 마셔도 온 마음을 다해 마시며 성스러운 순간을 만들고, 그 성스러움을 온 삶을 통해 확장하라고 말합니다.


일요일 아침입니다. 어쩌면 오늘도 지난 주와 비슷비슷하게 흘러가는 지루한 시간일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듭니다. 그래도 좋은 책을 읽으며 어떤 문장에 한참 눈이 머물 때, 호두의 오동통한 볼을 만지며 그 부드러운 건강함을 느낄 때, 오늘따라 유난히 맑은

햇살 아래를 걸어갈 때. 아마도 그런 몇몇 순간의

반짝임은 존재하는 하루일 거 같아 기대해봅니다.



단무지 좋아해?


아이와 근처 대도시로 뮤지컬을 보고 오는 길에 휴게소에 들렀습니다. 출출해서 국수 하나를 시켜 사이좋게 나누어 먹었습니다. 아이와 휴게소에 들러 음식을 먹는 것은 처음 도전해보는 일인데, 그것만으로도 호두가 많이 큰 거 같아 마음이 좋았습니다.


한참을 먹다 호두가 물었습니다.


“엄마, 단무지 좋아해?”

“아니.”


제 말을 듣고 호두는 마지막 하나 남은 단무지를 얼른 먹었습니다.


“엄마가 좋아한다고 하면 엄마 주려고 했어?”

“응!“


마지막 남은 단무지를 곧바로 먹지 않고 곁에 있는

사람에게 물어볼만큼 호두가 컸다는 사실이 대견하기도 하고, 빨리 커버린 거 같아 서글프기도 했습니다. 그래도 아직 아가라 저에게 단무지 좀 더 가져오라며 바로 심부름을 시키는 바람에 감동을 채 음미할

시간도 없었지만요.


부른 배를 내밀고 손잡으며 휴게소를 나오다 굴러가는 꽃잎에 열심히 안녕을 외치는 호두. 예전에 여러 번 읽어준 ‘알사탕’ 그림책에서 낙엽들이 떨어지며 안녕안녕을 외치던 걸 기억하고는 언제고 떨어지는

꽃잎과 잎들에게 안녕을 전합니다.


그 순간을 지나며 아이를 키운다는 건 정말 귀한 경험이라 또 생각했습니다. 한 존재가 세상에 나와 세상의 모든 것을 처음으로 받아들이는 순간순간을 목도하며, 첫 마음이란 것이 얼마나 새하얗고 눈부신지를 깨닫습니다. 호두가 맛있는 단무지를 만나고 마지막 하나를 사랑하는 이에게 양보하자 마음 먹는 순간, 굴러가는 꽃잎을 만나는 순간. 그 순간 곁에 있어 참 좋았습니다. 그날 본 값비싼 뮤지컬보다 훨씬

더 비싼 공연을 1열에서 매일 보고 있는 기분이랄까요.


몸과 마음의 힘이 부족하여 육아는 언제나 고달프지만, 호두의 곁에 있는 시간을 어떻게든 사수해야겠다 생각합니다. 매일 우연히 펼쳐지는 그 처음의 순간을 놓치지 않기 위해서요.


세상 모든 귀한 것들에는 반드시 귀함 만큼의 대가가 따름을, 육아에서는 그 대가가 끊임 없는 피곤과의 싸움임을 느낍니다. 그래도 지지 않고 그 귀함을 놓치지 않아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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