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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빗소리 May 21. 2023

노력이라는 기회

안녕하세요, 즐거운 주말 보내셨는지 궁금합니다. 일주일에 7일이라는 시간이 있고, 5일과 2일이 갖는 하루의 색이 전혀 다르다는 것은 얼마나 재미있는 일인지요. 5일 동안 팽팽하게 짜여진 하루를 열심히 달려가다가 2일 동안 느릿느릿 산책을 하는 느낌이랄까요. 마치 비발디의 음악 같아요. 알레르고-라르고-알레르고로 흘러가는 악장처럼 삶의 변화는 하나의 음악 같이 아름답습니다. 라르고의 시간을 끝낸 지금은 다가올 알레르고의 시간이 무섭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빠르게 마찰하는 바이올린의 현을 바라보며 느껴지는 쾌감처럼 분명 빠르게 달리는 순간 속의 제가 멋지게 느껴지는 순간도 있을 거라 위안 삼아 봅니다. 일주일 동안 모은 글감들을 집밥을 만들 듯 정성껏 다듬고 볶으며 요리해보았습니다. 이 글이 잘 차려진 집밥을 먹듯 마음을 잔잔하고 건강하게 만들어주길 소망해봅니다. 마지막 라르고의 시간, 평안하시길요.



                

나는 나

     

며칠 전, 평소 좋은 이미지로 생각하고 있던 분과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습니다. 자주 마주치지만 서로의 일상이 바빠 개인적인 대화를 나눌 시간이 거의 없었는데, 그날은 식사 자리에서 우연히 맞은 편에 앉게 되었습니다.      

바쁘게 돌아가는 하루 속에서 나를 위한 시간이 없어서 새벽 4시에 일어나 자기만의 시간을 갖는다는 이야기, 건축사로서 어떤 집을 만들고 싶은지에 대한 이야기, 사춘기 세 아이를 키우며 드는 생각들. 그분의 이야기는 직업을 가진 워킹맘으로서 무척 공감이 가고, 새로운 통찰을 주는 이야기였습니다.


의사는 환자를 만나고, 검사는 죄를 지은 사람들을 만나지만, 자신은 한 사람의 일생에서 가장 행복하고 부유한 시기의 그 사람을 만나는 거 같다는 그분의 생각이 놀라웠습니다. 제가 그분께 들은 건축가의 삶도 무척 바쁘고 퍽퍽한데, 그런 관점으로 일을 하니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도 했습니다. 자신의 직업을 사랑하고, 사람들의 꿈을 실현시켜주는 일에 의미를 가지며 산다는 게 얼마나 멋지던지요.     


생활지도가 어려운 아이들, 예의가 없는 학부모, 교사를 보는 사회의 차가운 시각으로 점점 움츠러들고 있는

교직 사회를 생각해보았습니다. 악조건이 많은 상황이지만, 그래도 내가 매일 대하는 것이 이미 굳어질대로 굳어져버린 클레이 같은 어른들이 아니라 아직은 이리저리 자신의 형태를 바꿀 가능성이 있는 아이들이란 것이 다행입니다. 일생에서 가장 마음이 깨끗한 시절의 그 사람을 만나 소통의 벽 없이 서로를 대할 수 있는 것이 좋습니다. 무엇보다 학습으로든, 생활지도로든 내가 그 사람의 삶에 무언가를 기여하고 있다는 마음이 가장 좋은 것 같습니다. 교사들마다 서로의 재능이 다르기에 어떤 선생님을 만나든 아이가 새롭게 성장할 부분이 있다는 것도 얼마나 멋진 일인지요.     


한때는 저만의 선생님상을 마음 속에 세워놓고 제 자신을 깎아내리고 채찍질했습니다. 아마도 그렇게 산 세월이 10년은 넘은 거 같습니다. 이제 20년이 다 되어가는 시점에서 바라보니 저만이 아이들에게 베풀어줄 있는 특별한 가르침이 있는데, 왜 그리 남과 비교하여 저를 닦달했는지 모르겠습니다. 남은 20년은 나만이 아이들에게 줄 수 있는 것에 집중해보자는 생각을 합니다. 온 세상의 빗소리는 하나이듯이 온 세상에서 빗소리라는 사람만 줄 수 있는 것이 분명 있을테니까요. 그런 생각들을 하니 움츠렀던 마음들이 조금씩 펴지는 거 같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 자신일 때가 가장 편안한 것 같습니다. 교사로서 살아갈 때도 이 사실을 놓치지 않아야겠습니다.                




노력이라는 기회     


얼마 전 하입보이의 작곡가 250에 대한 칼럼을 읽었습니다. 디토와 하입보이를 작곡한 250은 소위 말하는 최근 가장 잘 나가는 작곡가입니다. 처음 하입보이를 들었을 때 어떻게 이런 곡을 쓸 수 있을까 생각이 들었습니다. 곡 흐름과 음의 배열이 정말 새로웠거든요. 칼럼의 단어를 그대로 쓰면 가요계는 ‘영재들의 놀이터’입니다. 어릴 때부터 음악적으로 뛰어난 재능을 가진 사람들이 쉬이 두각을 드러내는 곳입니다. 저는 250 또한 다르지 않았을 거라 예상했어요. 하지만 250은 이런 말을 남깁니다.      


“음악은 영감이 아니라 엉덩이로 만드는 거예요.”     


제가 존경하고 좋아하는 대부분의 작가들은 무척 성실한 사람들입니다. 매일 일정한 시간에 일정한 양의 글을 쓰기 위해 책상 앞에 앉는 사람들이죠. 요즘 가장 힙한 음악을 만드는 250의 하루는 그다지 힙하지 않았어요. 좋은 앨범을 만들기 위해 무려 7년이나 공을 들이는 사람이었죠.


250의 말은 제게 위안이 되었습니다. 저는 글쓰기에 타고난 재능이 없지만, 글을 쓸줄 아는 나이부터 상당 시간을 계속 글을 써왔거든요. 내게 일어난 모든 일을 끊임 없이 성찰하고 그 결과를 글로 남기는 일을 평생을 걸쳐 꾸준히 해왔던 거 같습니다. 그것은 제가 가장 좋아하는 일이고, 머릿 속의 놀이터가 개장하는 순간입니다. 물론 그런 생각들을 하나의 글로 뽑아내는 순간들은 꽤나 고통스럽지만, 내 눈앞에 결과물이 펼쳐질 때의 보람이 얼마나 나를 벅차게 하는지 알기에 끊임없이 써봅니다.     


워킹맘으로 살아가기에 저에게 글을 쓸 수 있는 시간은 꼭 비싼 사치품처럼 사치스럽습니다. 맘 편히 키보드를 두드리는 시간이란 건 애초에 생길 수 없는 하루의 구조입니다. 오늘도 이 글을 쓰기 위해 아침에 일어나 허겁지겁 노트북을 열고 30분을 두드리다가 하루종일 육아를 하고 아이가 잠시 만화를 보는 동안 또 재빨리 노트북을 열었습니다. 귀찮은 마음을 어떻게든 일으켜 책상에 앉히고, 부지런히 키보드를 두드리는 시간. 250이 말하는 엉덩이의 시간은 매일의 게으른 나와 싸우는 시간입니다.      


겨우 확보한 시간으로 쓰는 이 글들의 완성도를 묻는다면 자신이 없습니다. 하지만 성실히 노트북 앞에 앉아 빼곡하게 빈 화면을 채워가면서 적어도 한 문장 정도는 건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외로운 싸움을 이어 가봅니다. 제 글은 비록 완성도가 떨어지겠지만, 글을 쓰기 위해 성실하게 이어나갔던 제 노력은 완성도가 높았을테니까요.           



꽃에 대한 성찰


꽃을 정말 좋아합니다. 3년 전까지만 해도 꽃은 특별한 날에만 사는 것이었는데, 제가 꽃을 감상하는 것을 진심으로 좋아한다는 것을 안 뒤부터는 꾸준히 꽃을 삽니다. 꽃을 사면서 자연스럽게 4~10일 정도 각각의 꽃을 돌보게 되었고, 꽃마다 돌보는 방법이 각각 다르다는 것 또한 자연스럽게 배우게 되었습니다.      

13년 전에 일본 여행을 다녀왔는데, 그때 일본에 가서 느꼈던 것 중 하나는 일본의 꽃집에서 파는 꽃들이 우리나라 꽃집과 종류가 많이 달랐다는 것입니다. 그때 당시에 우리나라는 누구나 아는 흔한 꽃들을 팔았다면, 일본의 꽃들은 생전 처음 보는 종류의 꽃들이 많았거든요. 13년이 지난 지금, 꽃집들을 보면 그 옛날의 일본처럼 다양한 형태의 꽃들, 생전 처음 보는 꽃들이 많아진 걸 느낄 수 있습니다. 꽃 시장도 꾸준히 성장해왔던 거예요.      


한 번 돌본 꽃은 제 머릿속에 각인됩니다. 꽃이 가진 특성들이 차곡차곡 채워지는 거죠. 꽃에 대해 알면 알수록 삶이 좀 더 풍성해지는게 느껴져요. 하나의 세계를 제대로 배우면 다른 세계들을 보는 시야가 또 달라지죠. 꽃의 세계는 그만큼 제게 세상을 보는 시선을 달라지게 해주었어요. 세상에 같은 꽃을 하나도 없고, 저마다의 꽃이 각자의 아름다움과 장단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제게는 위로가 되더라구요. 제가 잘나든 못나든 세상에 나는 딱 하나라는 단순한 사실이 크게 다가왔거든요.      


매일 저녁을 먹고 난 뒤에 꽃을 돌봐주는데, 물로 인해 물러진 줄기를 꽃가위로 잘라주고, 깨끗한 물로 교체해준 뒤 얼음을 넣어줍니다. 시든 꽃이나 나뭇잎은 꽃가위로 잘라주기도 하구요. 마치 반려동물을 목욕시켜주고 털을 빗어주듯이요. 살아있는 생물을 매일 만질 수 있는 것은 생각보다 정서에 참 좋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렇게 꽃을 만지다보면 조화가 줄 수 없는 생명력이 얼마나 아름다운 것인가 하는 생각을 해봐요. 사람들은 꽃의 아름다움이 멈췄으면 하는 마음에 가장 아름다운 순간을 본따 조화를 만듭니다. 조화는 만들어진 목적 때문인지 바라볼 때에 온전하게 아름답게 느껴지진 않아요. 무언가 부족하죠. 살아있는 꽃을 만지다보면 알게 되요. 꽃이 태어나서 한껏 피어나고 시들어가는 그 모든 순간이 모두 소중하다는 것을요. 아름다움이 한정적이기에 꽃이 더 아름답다는 것도요. 내일이면 어떤 모습으로 변할까, 내일은 더 피어나겠지 기다리는 시간도 살아있는 꽃만이 주는 특별함입니다.      


이번에 산 꽃의 이름은 클레마티스 벨이라는 꽃입니다. 한 송이에 만원이나 하는 어마어마한 몸값을 가진 꽃이지만, 단 한 송이만으로도 존재감이 확실한 아이예요. 줄기와 잎의 라인이 예술작품 같거든요. 클레마티스 벨 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요. 화려한 꽃이 아니어도 이미 줄기와 잎이라는 본질적인 것으로 존재감이 확실한 사람이요.      


무엇이든 진지하게 파내다보면 어떤 깨달음이든 다가옵니다. 저는 꽃을 보면서 그런 것을 느꼈고, 제가 깨달음을 얻은 존재가 꽃이라는 사실이 참 좋아요.           




나는 친절한 엄마가 아닙니다     


저는 그다지 친절한 엄마가 아니예요. 타고나기를 예민한 사람이라 감정 기복이 무척 크죠. 물론 어릴 때부터 계속 훈련을 받아 저의 감정을 밖으로 막 드러내지 않고, 그저 제 안에서 일어나는 광풍으로 끝날 때가 많지만요. 남들이 보지 않는 제 바다는 자주 볕이 났다 소나기가 쏟아지고 폭풍우가 밀려옵니다. 남들에게는, 그리고 아이를 제외한 가족들에게는 그동안 어느 정도의 포장이 가능했는데, 육아는 정말 제 자신을 포장할 수 없다는 것에 좌절감을 느낍니다. 직장을 다니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가장 많이 붙어 있는 나의 딸에게 제 감정의 민낯이 자주 드러난다는 것이 슬픕니다. 슬프지만 인정해야 하는 확실한 사실이기도 하죠.      


애초부터 감정이 무던한 엄마였으면 내 딸에게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생각을 하지만 다시 태어나지 않는 이상 불가능한 것이겠죠. 타고난 예민함을 남에게 쉬이 드러내지 않기 위해 훈련을 했던 것처럼 아이에게 친절을 베풀기 위해 끊임없이 훈련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요. 육아가 처음이기에 매일 실수투성이이지만, 내일은 오늘보다 친절해지기 위해 매일 훈련합니다.      


최근 영상을 하나 보았는데, 아이가 어느 정도 모든 일들을 스스로 해낼 수 있는 고학년이 될 때까지는 옆에서 모든 것을 친절하게 가르쳐주는 어른이 필요하다고 합니다. 하나씩 살아가는 기술을 배워야 하는 순간 순간 속에서 아이에게 필요한 건 기술보다 친절함이 더 우선이라는 것이죠. 아이는 그 순간의 정서를 기억하기 때문이라 해요. 기술은 누구나 가르칠 수 있지만, 친절하게 가르치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없는 사실이죠. 물론 이 글을 쓰고 있는 저 또한 친절하게 가르치는 일이 참 어렵습니다. 무한한 인내심과 상당한 감정조절력이 필요하니까요.      


6살이 되가는 동안 아이가 보였던 억울함의 눈빛을 기억합니다. 당연히 처음해봐서 못하는 것들을 만날 때마다 저는 피곤함에 짜증을 낼 때가 많았고, 말을 못하던 녀석은 억울함과 서글픔을 담은 눈빛을 내게 보내곤 했죠. 그런 눈빛을 떠올리면 가슴이 따끔따끔 따갑지만, 이미 되돌릴 수 없는 일입니다. 앞으로 안 그런 엄마가 되는 것에 더 집중하는 것이 중요하단 생각입니다.      


매일 어제보다 조금은 더 친절한 엄마가 되자. 아니, 친절한 엄마 뿐만 아니라 친절한 사람이 되자 다짐해봅니다. 성장은 더디겠지만, 아주 조금씩이라도 친절해지다 보면 아이가 성장한 뒤에 아이에게 꽤 괜찮은 친구로 옆에 남지 않을까 기대해봅니다.      


요즘 같이 모든 것이 세련되게 느껴질 정도로 정서가 건조한 시대에 친절함은 생각보다 큰 무기가 됩니다. 그저 스쳐 지나가는 사람의 친절한 태도 하나, 말 한 마디에 금세 흔들리곤 하니까요. 흔들리는 것에 그치지 않고 때론 오후내내 떠올리며 기분 좋아지곤 합니다.      


제가 완성형의 엄마로 아이에게 다가가길 바라는 것이 얼마나 불가능한 바람인지를 압니다. 그래도 자꾸만 마음 속에 이는 바람에 자주 좌절합니다. 저를 속이는 마음 속 거짓말들에 속지 않고, 매일 할 수 있을 만큼만 조금씩 노력해보자 마음 먹어봅니다. 부족한 엄마에게 늘 다정한 내 어린 친구를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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