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빗소리 Apr 23. 2023

평범해서 소중한 밤

# 평범해서 소중한 밤     


잠들어가는 아이의 천천히 좁아지는 눈을 한참 바라본다. 그리 특별한 일이 없지만, 그리 큰 슬픔도 없던 오늘 하루. 아이와 평범하게 잠들 수 있는 이 포근한 공기에 감사함이 느껴진다. 잠들 수 없었던 많은 밤을 기억한다. 그런 밤을 기억하기에 지루할 만큼의 조용한 오늘 밤이 소중하다. 내 손을 꼭 잡고 있던 아이의 손에 점점 힘이 떨어져 간다. 잠든 아이의 통통한 볼에 스스로 만족할 만큼의 뽀뽀를 가득 해준다.     


육아는 아무리 생각해도 나 같이 그릇이 작은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지만, 나를 닮은 작은 존재에게 내가 받고 싶던 사랑을 원 없이 줄 수 있는 것은 참 의미 있는 일이라 생각해본다. 참을성도 없고 실수를 연발하는 엄마이지만 말이다. 그래도 늘 열심히 뉘우치고 다시금 또 사랑을 퍼부어준다. 내가 받고 싶었던 만큼.    

  

이 모든 기억을 잊는다 해도 내 딸이 꼭 기억해주었으면. 자신을 감쌌던 무형의 따뜻함을 말이다. 빈 그릇으로 세상에 태어났을 때 그 그릇을 한동안 가득 채웠던 온기를 말이다. 요리를 잘하는 엄마 밑에서 자란 아이들은 그 맛을 기억하기에 결국 요리를 잘하게 된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사실일까는 모르겠지만 어떤 맛이 맛있는지 안다는 건 중요한 자질 같다. 온기를 아는 아이들은 그 온기가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온기의 맛을 분명히 기억하며 자랄 거 같다. 그리고 사람들 속에서 온기를 주고 받는 방법을 스스로 알아낼 것이라 믿는다.      


이 놀랍도록 평온한 밤. 걱정 없이 잠들 수 있게 해준 모든 것들에 감사하다.      




# 롱블랙     

구독서비스가 유행인 시대이다. 활자 중독이라 생각될 만큼 글 읽는 것에 중독이 강한 사람인데, 얼마 전 지인에게 롱블랙에 대해 들었다.   

  

국내 최초 24시간 제한 구독 미디어.

올해 2월 기준 20만명의 구독자 보유.

매일 하나의 긴 글을 발행하며 24시간 공개 후 사라짐.

트렌디한 인사이트를 주는 글.     


지인이 이야기해준 롱블랙에서 본 글들은 상당히 유의미해 보였고, 통찰을 주었다. 한 번 체험하고 싶다는 마음이 들어 며칠 고민하다 오늘 가입을 했다. 오늘은 야구선수 오타니 쇼헤이에 대한 글이었다.      


나는 무슨 일을 하든 가장 중요하게 보는 것이 ‘태도’인데, 오타니 쇼헤이라는 선수는 바로 그런 선수였다. 실력이 뛰어났지만, 그만큼의 훌륭한 태도가 뒷받침이 된 선수이다. 야구 경기 시합 후 경기장의 쓰레기를 줍는다는 오타니는 그 행동에 대해 그저 ‘다른 사람의 운을 줍는 것일 뿐이다.’라고 말했다 한다. 읽는 내내 기분이 좋았다. 오타니의 운을 만들어준 건 그가 차곡차곡 쌓아온 좋은 태도 때문일 거란 생각이 들었다. 단숨에 얻은 벼락 같은 운이 아니라 성실히 만들어진 단단한 도자기 같은 운이기에 더 기분 좋게 느껴졌다.    

  

트렌디한 인사이트. 롱블랙이 스스로를 지칭하는 이 단어 조합에서 지금 이 시대의 흐름을 읽고, 그 흐름 속에서 통찰을 담는 글들을 지향하는 사이트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앞으로 계속 구독하게 될지 해지할지는 모르지만, 이번 한 달은 롱블랙이 주는 글을 꾸준히 음미해볼 생각이다. 세상은 넓고 글을 접하게 되는 방식들이 다양해지니 책벌레로서 참 반갑다.        


   

# 확고한 취향     


유명한 옆베개용 필로우를 하나 샀다. 박스를 여는 순간 폭신함 중독자 호두가 다다다 달려오더니 필로우를 들고 도망 갔다. 호두는 집에 있는 시간의 상당 시간을 필로우의 친구(?) 베개들과 기차 놀이를 하고, 필로우를 안고 뒹굴뒹굴 하며 한참을 필로우 환영 파티를 했다.      


저녁에 차로 멀리 갔다가 다시 돌아오는데, 차에서 자주 잠드는 호두가 자꾸만 졸린지 하품을 했다. 자신이 잠들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갑자기 호두가 말을 걸었다.      


“엄마, 내가 만약 잠들면 내 다리에 아까 그 베개 꼭 껴줘야 해. 알았지?”     


호두가 잠들기 전에 이렇게 확고한 지시(?)를 내리는 건 처음이라 웃음이 나왔다. 새로 산 필로우가 정말 마음에 들었나 보다. 자신의 취향을 정확히 알고, 엄마에게 그 취향을 분명히 어필하는 호두가 부럽기도 했다. 나는 어릴 때 그러지 못했으니까 말이다. 사실 내가 뭘 좋아하는지도 어릴 땐 잘 몰랐던 거 같다.     

 

확고한 취향을 갖는다는 건 행복한 일이다. 사느라 바쁘면 내가 뭘 좋아하는지조차 잊어버리고 사는데, 호두는 그걸 벌써 알고 누리고 있다. 지켜보는 마음이 좋다.


살면서 호두가 좋아했던 것들을 기억하고 기록하며, 존중해주고 싶다. 내 취향을 존중 받는다는 것은 꼭 나란 존재를 존중받는 느낌이니까.           



# 작은 루틴들     

어린 아이를 키우는 워킹맘이다보니 학교-집만 왔다갔다 하는 일상을 살아가고 있다. 똑같은 하루가 대부분이다보니 자주 무미건조해지는 일상이다. 조금이라도 일상에 즐거운 기운을 불어넣고자 작은 루틴들을 만들어본다.     


금요일 밤은 좋아하는 드라마 보며 맛있는 간식 먹기

마음이 울적한 날은 마라탕을 배달시키기

몸이 아픈 날은 누룽지를 끓여 먹기

미세먼지가 나쁘지 않은 날은 꼭 아이와 한 시간 정도 산책하기

평일에 한 번 정도는 카페에 20분이라도 들러 한 문장이라도 글을 써보기     


내가 20대 때 이런 루틴들을 봤다면 코웃음칠 만한 소소한 것들이다. 하지만 특별한 시간을 쉬이 낼 수 없는 나에게는 이 소소함이 소중한 행복으로 다가올 때가 많다. 앞으로도 어떤 재밌는 루틴들을 만들어볼까 고민해보려 한다. 아이와 함께 하는 삶은 2인 3각 달리기처럼 무겁고 불편한 느낌이 들 때가 많지만, 아주 사소한 것의 중요함을 알아갈 수 있어 참 좋다. 아이를 낳지 않았다면 절대 몰랐을 사소한 행복이다.    


  

# 오늘 읽은 좋은 글     


(지혜로운 사람)


 지혜로운 사람이란, 자신이 받게 될 스트레스를 스스로 덜어낼 줄 아는 사람을 뜻하는 것이었다.

 누구에게나 동등하게 주어지는 한정된 시간 중에서,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단 20분만이라도 나의 것으로 만들 줄 아는 것. 평소보다 20분 먼저 일어나 아침을 맞이하고, 약속된 시간보다 20분 먼저 움직이는 것.      


(중략)     


 당장 해치워야만 하는 일을 미루지 않는 것 또한 비슷한 맥락의 지혜이다. 청소와 설거짓거리를 쌓아두지 않고, 계획한 운동을 꾸준히 반복하며 성취도를 높이고, 내일의 나에게 무리가 되지 않도록 오늘의 내게 주어진 몫을 제때 해내는 것. 이처럼 내면의 방해꾼과 끊임없이 힘 겨루며 잦은 승리를 취하는 습관은 이미 내 속에 축적된 스트레스를 한 움큼 덜어줄 뿐 아니라 무너진 자존감을 바로 세워주는 지지대 역할을 톡톡히 해낸다.      

-하태완, ‘아무런 대가 없이 건네는 다정’ 중에서    

 

오늘 이 글을 읽으며 최근에 계속 했던 생각들이라 무척 공감했다. 요즘 나는 내일의 내가 부담스럽지 않도록 내일 벌어질 많은 일들을 최대한 경감해주기 위해 오늘을 산다. 오늘 조금만 더 부지런하게 살아서 내일 내가 받을 스트레스를 줄여주는 것이다. 게으른 나에게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항상 데드라인을 에너지 삼아 끝까지 게으름 피우다 허겁지겁 일하는 나이기에. 여전히 그 버릇 못 고쳐서 어제도 마감 시간 20분을 남기고 계획서를 제출한 나이지만, 그래도 요즘은 예전에 비해 미리미리 대비하고, 오늘 해야 할 일을 미루지 않도록 바로 처리하려 노력한다. 장족의 발전이다.      


남들의 칭찬보다 조금씩 쌓여가는 작은 성취감들이 훨씬 더 정신에 이롭다. 비록 나만 아는 정도의 작은 성취감이지만, 반복될수록 내 자신과의 신뢰가 싹 트는 걸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무슨 글이라도 쓰며 다른 이와 소통해보자는 오늘의 약속을 스스로 지켰고, 성취감을 느끼고 있다.      


어제의 나에게 고마워하는 사람으로 살아가고 싶다. 내일의 나에게 부끄럽지 않은 오늘의 내가 되고 싶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이 마지막인 듯     


엄마 돌아가신 뒤 내가 가장 많이 달라진 점은 그동안 시간, 여유, 용기, 돈이 없어 해보지 못한 일들에 계속 도전하는 것이다. 안 입던 옷 스타일을 이것 저것 입어보고, 20대 이후 절대 쓰지 않던 베레모를 사며, 그동안 혼자만 부르는 노래를 벗어나 여성 보컬을 뽑는 밴드에 들어가고, 꽃을 사랑하는 스스로를 위해 제철 꽃을 통해 계절을 느껴보는 것. 고마웠던 이들에게 말로, 선물로 진심을 다해 마음을 표현하고, 비싸서 먹어보지 못했던 것들을 먹으며, 아이와의 일분 일초가 흘러감을 아까워하며 아이에게 좀 더 집중하는 것.    

  

아마도 나 또한 갑자기 세상을 등질 수도 있다는 자각이 들자 내일이 없는 듯 살아가는 태도가 점점 삶 속에 스며들고 있다.      


엄마의 카드 대금을 정리하다 엄마가 돌아가시기 3주 전에 빌로이앤보흐 그릇을 결재한 내역을 보고 웃었다. 자신이 좋아하는 것들을 향유하며 살아간 엄마의 모습이 좋아 보여서였다. 엄마가 제대로 써보지도 못하고 너무 검소하게 아끼고 사셨다면 아마도 내가 많이 슬펐을 거 같다. 좋아하는 것들을 사고, 즐겁게 누리며 산 엄마이기에 보내는 마음이 좋다. 그리고 내가 엄마의 카드 대금을 대신 갚아주며 속상해 하는게 아니라 엄마가 즐겁게 누리며 산 것에 대해 진심으로 기뻐하고 박수 쳐줄 수 있는 딸이라 감사하다.      


오늘이 마지막인 듯 살아가고 싶다. 이 나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일들이 무엇일지 고민해보고 과감하게 실천하며 살아가려 한다. 조금 부끄러워도 어차피 할머니 되면 즐거운 추억으로 남지 않을까. 할머니가 되면 현재보다는 과거 속에서 살게 될텐데, 추억 빈곤자로 살고 싶진 않다.      


캐논변주곡처럼 매일 똑같아 보이는 멜로디이지만 조금씩 변주하며 사는 기술을 익혀야겠다. 아이에게 예상 가능한 일상은 정서적 안정을 주는 것이니까 그 일상을 크게 흔들지 않되 나 자신을 위해 소소한 떨림을 선사하고 싶다. 아이와 나를 위한 균형이 필요하다.                 



+ 오늘도 그냥 자고 싶은 유혹을 뿌리치고 백지의 공포를 이겨내게 해주신 하나님 은혜에 감사하다.

                   

매거진의 이전글 고마운 공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