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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빗소리 Jul 14. 2023

나는 너의 우치첼 :)

지금의 난 꼭 시험을 힘껏 치르고 방전된 고등학생의 마음이다. 학기말이지만, 성적 입력 업무를 잠시 미루고 단 한 가지 목표에만 매달렸던 지난 며칠이었다. 한참 성적 입력할 시기에 뭐 하는 건가 하는 걱정이 순간순간 올라왔지만, 지금 내게 더 소중한 게 무엇인가를 계속 고민하며 더 중요한 것들에 시간의 추를 달았다. 지난 한 달의 이야기를 써보고자 한다.


한 달 전. 교감선생님께서 이중언어대회에 나가보자 하셨다. 이중언어대회는 다문화 학생이나 외국인 학생이 한국어와 외국어를 웅변 형식으로 암기하여 발표하는 대회이다. 지금 하고 있는 업무가 너무 바빠서 한 차례 거절했지만, 지도를 많이 도와줄 것이니 너무  걱정 말라는 말씀을 반복하시니 도저히 거절할 수가 없었다. 나는 올해 5년 차 만기여서 학교를 떠나야 하는데, 그동안 업무가 바빠 이동 점수까지는 미처 생각하지 않고 살아왔다. 그걸 잘 아시는 교감선생님께서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고 싶어 하셨다. 교감선생님의 진심이 느껴졌다. 성공 여부는 알 수 없지만, 그 진심을 두 손으로 꼭 잡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대회는 사랑의 마음으로부터 시작됐다.


교감선생님의 마음과 달리 현실의 내 시간은 정말 틈이 없었다. 대회 일주일 전까지 내가 주관해야 하는 회의와 행사, 처리해야 할 공문이 매일 빼곡하게 있었다. 매일을 ‘오늘 하루 살아남기’라는 미션을 손에 쥐고 장거리를 뛰다 지쳐 잠드는 육상 선수 같이 살았다. 당연히 대회는 뒷전이었다.


나와 함께 대회를 나가기로 한 아이들의 부모는 키르기스스탄 출신의 이주노동자였다. 가까이 있는 공단에 일을 하러 한국에 온 것이다. 육 남매 중 다섯째 레나, 여섯째 데이브(가명)가 우리 학교에 다닌다. 사실 나는 아이들을 만나며 키르기스스탄이란 나라에 대해 처음 알게 되었다. 성인~초3까지 다양한 연령대의 자식을 6번 키워서인지 레나의 어머님은 요즘 한국 분위기에서는 ‘방임’이라 볼만큼 아이들에게 많은 자유를 허락하는 거 같았다. 두 분 다 일을 밤늦게까지 해야 하는 상황이라 어쩔 수 없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내가 볼 때는 비록 아이들이 자유분방해 보여도 예의가 있고 무엇보다 어른들에게 무분별한 애착을 보이지 않기에 잘 크고 있는 것 같았다. 내가 정서적 학대를 판단하는 기준 중 하나가 무분별한 애착(상대를 가리지 않고 누구에게나 사랑을 갈구하는 유형의 애착이라 할까)인데, 레나와 데이브는 그렇지 않았다. 레나와 데이브는 항상 씩씩하고 당당해 보였다. 우리 학교의 많은 선생님들이 이 아이들을 귀여워하고 호감을 가질 만큼 말이다.


레나, 데이브와 한 팀이 되는 것까진 좋았는데, 워낙 자유분방한 영혼들이라 성실성은 찾아볼 수 없었다.  이미 2주 전 원고를 주었지만 아이들은 나 몰라라 했다. 나도 정신이 없어 그걸 알아도 어찌할 수 없었다.


대회 일주일을 앞두고 아이들의 암기 상태를 체크하니 원고의 10% 채 외우지 못한 상황이었다. 도저히 안 되겠단 생각이 들어 아이들에게 솔직히 말했다. 대회를 포기하자고. 어차피 나가서 창피를 당하느니 안 나가는 게 더 좋을 것 같다고.


레나의 반응은 예상외였다. 절대 안 된다고, 자신이 열심히 외워보겠으니 나가보자 말했다. 알고 보니 레나는 야망녀였던 것이다. 다만 자신의 야망을 이루기 위한 방법과 성실함조차 처음부터 배워야 하는 야망녀였으나, 어찌 되었거나 레나가 대회를 향한 불타오르는 의지가 있다는 건 꽤 긍정적인 신호였다. 아직 10살인 데이브는 아무 생각이 없어 보였지만 말이다.


그동안 내가 바빠 보여 차마 말을 못 꺼내시던 교감선생님께서는 5일 정도밖에 시간이 안 남았다는 것에 충격을 받으셨다. 월요일 저녁 약속도 취소하시고 레나와 저녁까지 연습을 하시겠다는 교감선생님의 결연한 모습을 보며 차마 혼자 퇴근할 수 없었다. 아무리 도와주신다 해도 그 도움을 뻔뻔하게 받고만 있는 건 성격상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교감선생님이 30을 주시면 60으로 돌려드려야 속 편한 성격이었다. 결국 나도 야근을 하며 레나를 지도하시는 교감선생님 옆에서 지도 방법을 배우고 보조했다.


레나는 정말 어떤 일을 목표로 세우고 차근차근 노력하는 거조차 새로 배워야 하는 아기 같았다. 그러나 그 과정을 조금씩 배우자 마치 스펀지가 물을 빨아들이듯 쭉쭉 흡수했다. 월요일 하루 만에 레나의 대회 참가 여부에 파란불이 켜졌다. 적어도 동상은 받을 수 있겠구나라는 확신이 생겼달까. 그날 레나와 데이브를 집에 데려다주며 고생한 아이들이 안쓰러워 함께 베스킨 라빈스에 들렀다. 할짝할짝 콘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씨익 웃는 녀석들을 보니 마음이 뿌듯했다. 성공의 맛이랄까. 아직 결과는 모르지만, 몇 시간 동안 한 가지 목표를 위해 교사와 학생이 함께 합을 맞추며 무언가를 하는 즐거움은 아이스크림 맛보다 조금 더 달콤했던 거 같다. 레나도 스스로의 발표가 마음에 드는지 점점 재미있어했다.


다음 날부터는 내가 연습을 주도했다. 교감선생님은 미리 예정된 여러 스케줄로 저녁 시간이 바쁘셨다. 다행이었다. 어찌 되었거나 내가 지도교사인데,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내가 고생해서 이 과정의 벽돌을 쌓아 올리고 싶었다. 무엇이든 몸으로 부딪혀야 내 지혜, 내 경험이 되는 것이니까. 그게 내가 유일하게 세상을 배워나가는 방법이었다.


금요일 대회가 있기까지 일주일 내내 6살 호두를 남편에게 맡길 순 없어 결국 저녁마다 학교에 데려왔다. 레나, 데이브, 내가 우리 아이를 공동 육아하며 대회 준비를 하는 웃기는 상황이 연출되었다. 데이브가 아이와 도서관을 뛰어다니며 술래잡기를 할 때 나는 레나의 러시아어 암기 상황을 체크했고, 레나가 아이와 같이 어둠 속 복도 걷기 담력 테스트를 하는 동안 데이브의 한국어 발음을 교정해 줬다. 아이들은 금방 친해지는 것인지 호두는 레나와 데이브에게 하루 만에 흠뻑 빠졌다. 레나와 데이브도 호두를 무척 귀여워했다. 화요일부터는 세 명의 강아지들이 아이스크림을 할짝이는 모습을 보며 밤퇴근을 했다. 저녁 내내 피곤해도 아이스크림을 신나게 먹는 아이들을 태우고 집에 바래다주는 길은 늘 신나고 뿌듯했다.


마지막 날. 레나가 좀 더 여러 악조건 속에서 발표를 해보는 상황을 연출하기 위해 통학버스 정류장 앞에서도 발표하고, 다른 학년 교실에도 들어가 발표를 하게 했다. 마지막에 교장실까지 가려는데 갑자기 레나가 눈물을 보였다. 자꾸만 반복되는 부끄러운 상황이 너무 싫었던 것이다. 레나의 눈물이 왜 그리 안쓰러우면서도 사랑스러워 보이던지…. 우리 그만하자며 손 잡고 돌아가는 나를 레나가 거부했다. 끝까지 해보고 싶다 말하는 레나의 이야기를 듣고 너무 멋있어서 박수를 쳐줬다. 레나는 눈물을 닦고 교장선생님 앞에서 그동안 외운 스피치를 당당하게 보였고, 뿌듯한 표정으로 마무리했다.


대회날이 되었다. 나는 레나가 결국 자신의 기량을 다 펼칠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더 이상의 연습이 필요 없을 정도로 레나의 실력은 꽉 차있었다. 이 실력으로 1등을 못하면 그건 레나가 못해서가 아니라 다른 아이의 능력이 넘사벽이어서 일 것이다.


대회 장소에 도착하니 절로 긴장이 되었다. 총 7명이나 되는 심사위원 앞에서 발표를 해야 하는 상황을 바라보며 레나도 바짝 긴장한 것 같았다. 이제 주사위는 던져졌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레나의 마음을 꼭 지켜주시길 바라며 기도하는 것 밖에는. 원래도 심사위원을 웃기며 참가상으로 끝날 것 같던 데이브는 예상만큼 웃기며 자신의 차례를 잘 끝냈다. 시간은 흐르고 드디어 5번째 레나의 차례. 마치 내가 나가는 듯 심장이 쿵쾅 뛰었다. 시작할 때 나를 바라보는 레나에게 엄지 척을 보여줬다.


‘레나야, 잘하고 있어. 이제 돌이킬 수 없어. 그냥 너의 길을 가!’


나의 엄지는 그런 의미를 담고 있었다. 레나는 천천히 한국어 발표를 시작했다. 레나의 발표는 자신의 투포환 대회 도전에 대한 내용이었는데, 열심히 노력한 날들에도 불구하고 결국 친구가 던진 공에 상위권이었던 자신의 공이 순위권 밖으로 튕겨 나가는 처참한 이야기였다. 그건 레나만이 말할 수 있는, 아주 특별한 경험의 이야기였고, 생생히 본인이 겪은 일이니 레나의 어조에는 감정이 여실히 실렸다. 심사위원들이 점점 레나의 이야기에 집중하는 게 보였다. 레나의 이야기는 점점 후반부로 넘어갔고,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고 또 도전할 것이니 자신을 응원해 달라는 당돌함으로 끝이 났다. 한국어 발표가 끝나고 레나에게는 한국어보다 훨씬 쉬운 러시아어 발표가 시작되었다. 물 만난 물고기란 이런 것인가. 레나는 술술술 러시아어로 말했고, 중간중간 어떤 단어들은 강조하며 힘을 주었다. 어떤 말인지 알아들을 순 없었지만(나는 이 대회를 준비하며 100번 이상 레나의 발표를 들었기에 이제 상당 부분을 이해하지만), 러시아어를 모르는 사람이 봐도 정말 유창하게 말한다는 건 알 수 있었을 것이다.


레나의 발표가 끝이 났다. 충분히 잘했음에도 아쉬움이 스치는 레나의 눈이 나를 향했다. 나는 다시 한번 엄지 척을 날렸다.


‘잘했어, 레나야. 이건 누가 봐도 최고의 너야. 네가 1등을 못한다 해도 그건 네 탓이 아냐.’


아마도 내 엄지는 그런 의미였던 거 같다. 다행히 나의 엄지가 레나에게 위로가 되었나 보다. 레나는 좀 더 안정된 얼굴로 자리에 앉았다. 이후 이어진 모든 외국인 아이들의 발표를 들어보아도 레나만큼 잘하는 아이를 발견하지 못했다. 압도적인 1위. 함께 발표를 보고 있던 교감선생님과 나는 마지막 아이의 발표가 끝나는 순간 확신의 눈빛을 나누었다. 그리고 함께 팀이 되어 고생한 지난날들을 생각하며 두 손을 꼭 잡았다.


아직 레나의 순위는 발표되지 않았다. 아마도 다음 주까지는 기다려야 할 것이다. 누구와도 비교되지 않을 만큼 훌륭한 기량을 보여준 레나이기에 걱정되진 않는다. 설사 레나가 1등을 하지 못했어도 지난 일주일이 진심으로 재미있었다. 누가 상상이나 했겠나. 지난 일주일 동안 내가 두 외국인 아이들과 우정을 만들어 나갈 줄…. 레나가 먹고 싶다는 마라탕을 시켜 먹다가 다시는 마라탕은 안 먹을 거라는 레나의 말에 웃던 기억. 너무 놀고 싶어 나 몰래 친구 집에 도망간 레나에게 너랑 대회 안 나가겠다 엄포하니 레나가 30분 거리를 자전거로 달려와 사과했던 기억. 매일 저녁 연습이 끝나면 루틴 같이 하루의 끝을 마무리했던 베스킨 라빈스의 조명들. 아이스크림 문에 손가락이 살짝 끼어 놀라 우는 호두를 레나가 머리를 쓰다듬으며 위로해 준 순간. 퇴근할 때 깜깜한 교실에 가서 가방을 찾아와야 할 때 무서워하는 레나의 손을 잡고 호두가 어린 기사가 되어 함께 가주던 시간. 짧은 며칠이었어도 그 사이에서 따뜻하고 특별한 우정을 나눈 시간들이 돈으로도 살 수 없는 경험이 되었다.


레나의 꿈은 경찰이라고 한다. 운동 신경이 좋은 레나는 정말 경찰의 꿈을 이룰 수 있을 것만 같다. 나는 이번 대회의 결과를 떠나 레나가 어떤 목표를 설정하고 그 목표를 위해 차곡차곡 자신의 노력을 쌓아가는 과정을 배운 거 자체가 꿈을 이루기 위한 좋은 경험이 되었으리라 생각한다. 내가 레나에게 그런 첫 단추가 되어주었다면 그것만으로도 너무 행복하고 기쁘다.


사랑의 마음으로 시작되었던 대회는 결국 사랑의 마음으로 끝이 났다. 비가 퍼붓는 오후 끝에 레나와 데이브를 집 앞까지 안전하게 바래다주며 우리의 끝이 다가온 슬픔과 아쉬움을 진하게 느꼈다.


삶은 누구에게나 단 한 번 뿐이고, 그 삶의 바구니를 어떤 공으로 채워나갈지는 순전히 각자의 몫일 것이다. 나의 바구니는 색색깔의 다양한 공들이 찼으면 한다. 몇 개 되지 않아도 하나하나 특별하고 독특한 무늬를 가진 공이라면 좋을 것 같다. 레나와의 기억은 레나를 닮은 특별한 무늬의 공으로 내 바구니에 들어왔다. 비록 생활기록부 입력이라는 더 큰 산이 엄습해오고 있지만, 아마도 다시 타임머신을 타고 돌아간다 해도 레나와의 시간을 택하리라 확신할 수 있다. 내 선택의 기준은 언제나 무엇이 더 소중하고 반짝이냐에 달려있으니까 말이다.


나는 너의 우치첼. 러시아말로 우치첼은 선생님이란 뜻이다. 나는 지난 몇 주 동안 레나의 우치첼이란 자리에 앉는 기쁨을 누렸다. 레나와의 시간들 속에서 느껴졌던 여러 감정과 추억들은 아마도 오랫동안 잔상을 남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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