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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빗소리 Aug 27. 2023

예상 못한 방향으로

공교육 정상화를 위한 교사 집회를 마치고 부산으로 훌쩍 내려왔습니다. 저희 마을(서울-부산 사이)에서 시작하여 서울 찍고 부산까지 가며 어쩌다 보니 국토종단을 했네요.


이번 주 토요일은 어쩌다 보니 자유부인이 되었는데요. 부산에 사는 친구가 무척 보고 싶은데, 너무 멀어서 평상시에는 부산에 혼자 쉬이 가기 어려운 상황이라 이번엔 피곤해도 꼭 만나고 싶었어요.


집회 마치며 부산행 기차를 타는데, 너무 도른 자의 계획인가 싶었지만, 이번에 안 보면 또 오랫동안 못 볼 거 같아 그냥 기차에 몸을 실었습니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와 오래도록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선한 영향력을 가진 친구라 이 친구와 이야기를 나누면 남은 한 해를 어떻게 훌륭히 살아가야 할지 머릿속에 그려지고 새로운 다짐을 하게 되더라고요. 그래서 부산이 멀어도 친구와 단 한 마디라도 눈 마주치고 대화 나누고 싶어 시간이 허락할 때 주저 없이 오곤 합니다. 저에게 친구를 만나는 일은 합리성의 영역이 아니라 진정성의 영역입니다. 무리한 일정 속에 머리가 아플 때, 내 마음이 진정 원하는가 물어보고 원한다면 비합리적인 선택이라도 그걸 택해봅니다.


어쩌다 보니 막차를 놓쳤습니다. 계획에도 없던 외박을 하게 되었습니다. 급히 역 근처 숙소를 잡고 칫솔과 세면도구를 사서 들어갔습니다. 갈아입을 옷도, 그 어떤 편의용품도 없이 몸만 온 여행이 오랜만이라  헛웃음이 나왔어요. 막차를 놓치고, 갑자기 외박을 하고. 진짜 대학생 때 이후로 20년 만에 있는 일이네요.


타고나길 예민한 사람이라 밖에서 자는 걸 좋아하지 않습니다. 저에게 집에서 자는 잠은 퀘렌시아처럼 완전한 평안을 주거든요. 쾌적한 침대, 친숙한 세면도구, 편안한 잠옷. 어쩌다 여행을 가도 예민한 제가 불편하지 않도록 도라에몽 가방처럼 바리바리 싸갑니다.


그런 제가 맨몸으로 외박이라니요. 드문 일탈입니다.  그래도 나름의 불편함을 견디며 씻고 잠자리에 누우니 하루의 피로가 몰려옵니다. 그렇게 엉뚱한 일탈의 하루를 마쳤습니다.


마음의 지혜란 책에서 읽었는데, 마음이 답답할 때는 스스로를 다른 환경에 놓아보라 하더라고요.


답답한 시간들을 보내다가 갑자기 생각지도 못한 장소에서 다른 공기, 다른 풍경들을 보니 학교 안에 갇혀있던 생각들이 환기가 되는 거 같네요. 우울했던 마음의 틈을 비집고 새 공기가 들어옵니다.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고, 저와 동료들은 전체 병가로 진정한 공교육 멈춤을 하기로 결정했어요. 오히려 취지에 맞네요. 말 잘 듣는 착한 아이 짓 멈추고, 우리에게 불합리한 상황들에 큰 행동으로 질문을 던지려 합니다. 소담이샘처럼. 우리가 뭘 안 했나요?


최근 읽은 갈등에 관한 칼럼이 생각납니다. 분노를 배제한, 차분한 어조로 나누는 의견 갈등은 서로의 생각을 건강하게 한다고요. 교육부의 생각과 달리 교사들은 그 어느 때보다 매우 차분하고 이성적인 마음입니다. 우리가 광포한 마음으로 극단적인 선택을 한다 오해하는 모두에게 우린 그 어느 때보다 매우 이성적이고 당신들과 의견 갈등을 통해 교육 정상화를 시키려 한다 말해주고 싶어요. 당신들을 협상테이블에 앉히고 동등한 위치에서 갈등을 하고 싶으나 당신들의 비협조로 이 방법 밖에 없다고. 괴로운 직장인이 사장을 테이블에 오게 하는 방법이 파업밖에 더 있냐고. 지극히 정상적인 방법을 범죄 프레임으로 덧씌우지 말라고.


새로운 장소에서 밀려오는 새로운 생각들을 하며, 때론 이렇게  아주 비합리적이고 예상 못한 상황을 선택하는 것이 나의 생각을 더욱 확장하고 유연하게 만드는 건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현실은 어제의 고단한 스케줄로 지쳐 아침 기차로 집에 바로 돌아가는 여행 아닌 여행이지만요.


9월 4일 뒤에는 모든 상황이 어떻게 흘러갈까요? 교사들의 순수한 마음을 오도하고 흩으려는 교육부의 행보에 아침부터 답답합니다. 미래는 전혀 알 수 없지만 저는 최선을 다해 지금 제가 할 수 있는 일들을 해보려 합니다. 아무 일도 안 하면 정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테니까요. 무엇보다 우리가 공교육에 던지는 이 질문들이 지금의 무너진 저를 살게 합니다. 괴로운 나날이지만 저는 그 어느 때보다 제가 생각을 많이 하는 때인 거 같아 참 좋습니다. 행복보다 올바름을 택할 때 오는 감정은 특별해요. 인생의 희로애락을 넘어선 진정성에서 오는 미묘한 감정. 어쩌면 단순한 기쁨이란 단어로 설명 안 되는 복합적인 행복을 느낄 수 있어요. 그런 고차원적인 감정을 저에게 느끼게 해주는 이 여름, 교사 집단의 행보가 좋습니다. 아이들도 좋지만, 저는 훌륭한 동료들이 많은 이 직장에 대해 진심으로 존경의 마음이 듭니다. 힘냅시다. 개가 짖어도 기차는 갑니다. 이 혼란을 뚫고 우리의 일에 집중해요.


이상, 부산역 의자에서 철도 노조 준법 투쟁으로 기차가 40분 지연되어 하루 스케줄이 또 예상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는 빗소리 전합니다. 예전엔 불편하기만 했던 일이 우회 파업을 앞둔 입장이 되니 공감이 가고 이해가 되네요. 이래서 사람은 경험이 중요한가 봅니다. 공감의 영역이 점점 확장되네요. 제 한 몸이 편안한 삶보다 성숙한 눈으로 더 많은 것들을 보고 느끼는 생동감 있는 삶을 살고 싶어요. 저는 요즘 아주 불편하지만 성장통 속에서 부쩍 자라나고 있네요. 우리 잘하고 있어요. 저는 그렇게 생각해요. 좋은 주말 보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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