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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빗소리 Jun 22. 2024

고의적 낭비

# 고의적 낭비


토요일 아침은 내가 항상 글을 쓰는 시간이었다.

토요일에 출근하는 업무를 3년 동안 맡게 되면서

토요일 아침이라는 시간이 생겨났다.

아이들이 체육 활동을 하고 있는 강당을 빼면

학교는 매우 조용하다.

아무도 없는 학교는 꼭 잠든 것만 같다.

처음에는 이 고요가 무섭고 낯설어서 힘들었다.

오랜 시간을 거쳐 나는

이 고요에 비로소 적응하고 있다.

혼자 골똘히 생각하며 일주일을 돌아보고 글을 쓴다.


누군가는 이 시간을 업무를 하며 보내라

조언을 해준 적이 있다.

하지만 일주일에 내 맘대로 쓸 수 있는 시간이

매우 적은 탓에

이 시간만큼은 때론 하릴없이 마음껏 낭비하고,

자유롭게 쓰고 싶다.


낭비하는 거 같은 시간들은

나의 인생에 작은 구멍들을 만들고

그 구멍이 어쩌면 바람이 드나드는 역할을

하게 할지도 모른다.

그 구멍들이 나를 살게 할지도 모른다.


오늘도 나는 내게 주어진 아침의 시간을 마음껏 낭비해 본다.




# 내 늙음을 어떻게 대비할 것인가


정말 중요한 일정을 앞두고는 말을 아낀다.

평상시 그다지 비밀로 할만한 일이 없기에

딱히 비밀일 필요는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요한 일이 잘 성사되지 않을까 봐 애써 말을 아낀다.


며칠이 지난 뒤에

"아, 이런 일이 있었어."

라고 사후 보고 하는 편이랄까.


나의 행선지도, 내가 하고 있는 일도

주변이 모를 때가 더 많다.

아마도 주변 의견의 영향을

별로 받고 싶지 않아서 일지도 모른다.

내가 좋아하고 아끼는 일에 있어서는

소신이 매우 강한 편인데,

좋아하는 일은 다른 이의 의견보다

나의 느낌대로 밀고 나간다.

실패해도 그 실패를 온전히 받아들인다.

누군가의 말을 듣고 실패하는 것보다

내가 스스로 해보고 실패하는 것이 덜 화나니까.

누군가를 원망할 건더기를 만들지 않으니까.


최근에도 나는

이런저런 크고 작은 일들을 도모하고 있고,

그것들은 조용한 실패로 사그라든다.

종종 어쩌다 성공하는 날이면

그제야 주변에 이야기를 전한다.


보컬 트레이닝 수업만 해도 그렇다.

보컬 트레이닝 학원을 알아보고, 스케줄을 정하며,

막상 학원을 다니기 시작할 때까지

가족 외에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이제 한참 걸어가서

더 이상 돌아갈 수 없을  거 같단 지점에서야

나의 보컬 수업에 대해서 주변에 알리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하나 같이 기가 막혀했다.


밤 22:20분 수업이라고? 안 피곤해?

7살이면 아직 아이가 어린데, 바쁘지 않아?

시간이 나?

지금 하고 있는 일들이 많은 거 같은데

학원까지 다니는 건 무리가 아냐?


그러나 그런 의견들을 반영하기에는

나는 이미 멀리 간 터였다.

아무런 타격이 없었다.

그냥 수요일마다 성실하게 수업에 갈 뿐.


힘든 공연으로 만신창이가 된 날에도,

회식으로 맥주를 몇 잔 먹게 된 날에도,

아이가 잠들지 않아 한참 애를 쓴 날에도

묵묵히 수업에 갔다.  

정말 가기 싫어 죽겠는 날에도

딱 한 번만 해보자며 갔다.

그렇게 몇 달이 지나니

이제는 수업 가는 것이

그냥 출근하는 거 같이 자연스러워서

어렵지 않게 되었다.


노래 부르는 게 그렇게 즐겁냐고 묻는다면

단호하게 아니라고 하고 싶다.

호흡 공부만 몇 달째하고 있으니까.

제대로 된 노래는 몇 번 불러보지도 못했다.

지루하고 재미없다. 체력적으로 힘이 든다.


그럼 그런 거 뭐하러 하냐고 하면

나는 긴 인생을 대비하는

나의 노후 대책이라 답하고 싶다.

삶에서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꼽으라면

책, 글, 노래, 패션일 텐데,

다른 것들은 내가 노력하지 않아도

일정한 숙련도로 해낼 수 있지만,

이상하게도 노래만큼은 그렇지가 않다.

이왕이면 기존의 잘못된 발성법과 가창법을 다 부수고

기초부터 차근차근 올곧게 채우고 싶다.

인생 100세인데, 아직 노래를 불러야 할 날이

60년이나 남았으니.

교회 봉사를 해야 할 나날도 60년이 남았으니.

당장의 단기 목표는 밴드 보컬로서의 책임감이지만,

장기 목표는 노후까지 잘 노래 부르기 위해서이다.

나에게는 노후 연금 같은 것이

바로 노래 잘 부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은퇴하고도 계속 돈을 벌 것이니

노후 자금에 대해서는 앞으로

차근차근 접근해가나면 된다.

내가 노후에 걱정해야 할 것은

몸의 기능이 지금 같지 않을 때까지

누릴 수 있는 견고한 취미가 있는가.

늙어서까지도 누군가로도 대체할 수 없는

나만의 전문 영역이 있는가.

친구들에게 계속 사랑받을 수 있는가.

늙어서도 좋은 친구를 사귈 매너가

갖춰져 있는가 등등이다.

어쩌면 돈을 버는 것보다 이런 것들이 더 쌓기 어렵다.

대부분 오랜 시간 동안

차곡차곡 쌓여야 하는 것들이니.

그렇다면 나는 지금 착실하게

노후를 준비하고 있는 것이다.

매일 글 쓰고 책 읽으며,

나의 취미와 대체 불가한 재능을 갈고닦고 있고,

열심히 노래 부르며 견고한 취미를 쌓고 있고,

어떻게 하면 남에게 피해 안 주면서

호감을 살 수 있을까

인성을 열심히 갈고닦고 있으니까.


어떤 일이든 두렵다는 것은

그만큼의 대비가 되어 있지 않다는 의미이다.

늙음이 두렵지 않으려면

끊임없이 대비해야 할 것이다.

가득한 창고로 겨울을 두려워하지 않는 개미처럼.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것들을

차곡차곡 창고에 채우면서.


나는 늙음이 여전히 두렵지만,

두려워하지만은 않도록 오늘도 글을 쓴다.

노래를 부른다. 책을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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