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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빗소리 Apr 14. 2019

어쩌면 네가 하지 않은 말

친정에서의 일주일을 마치고 돌아왔다. 놀라울 정도로 많은 것을 할 수 있고, 한시도 가만히 있지 않고 자신의 운동성을 증명하는 아이를 본다는 것은 경이롭고도 행복하고 힘든 일이다. 아기를 잠깐 놓아둘 그 어떤 안전장치도 없이 온갖 모서리들 속에서 아이를 보호하느라 나는 잇몸 곳곳에 구멍이 났다. 아파서 음식을 씹지 못할 정도로 구멍이 났으니 얼마나 피곤했는지 내 스스로가 안쓰러울 지경이었다. 더군다나 아이가 요즘 새벽 6시 기상으로 바뀌어서 피곤함은 더욱 늘었다. 이 이야기를 들은 가족 한 분이 그럼 네가 일찍 자면 되지라고 이야기했는데, 갑자기 마음속에 분노가 일었다. 일찍 잠 = 육퇴 시간 축소 = 엄마의 여유시간 부족 = 우울의 공식을 모르시는 것이겠지. 요새 읽은 류시화 에세이를 본받아 '나는 지금 분노하고 있구나' 하며 내 감정 멀리 보기를 실천했다. 좀 덜 화가 났다.


아기 낮잠 자는 시간에 맞추어 운전을 하고 돌아왔다. 아기는 다행히 이동 시간 내내 자는 상태로 왔다. 아기 입장에서는 분명 외할머니 품에서 잠들었는데, 그대로 카시트로 옮겨지고, 눈을 뜨니 본인 집이어서 얼마나 황당했을까.


집에 돌아와서 다시금 나와 단둘이 남겨진 아기의 눈빛이 왠지 좋지 않았다. 말없이 혼자 한참을 노는 모습을 보였는데, 왠지 평소의 밝음이 빛바랜 듯 느껴져서 슬퍼졌다. 아기는 그런 식으로 외할머니와의 이별의 감정을 애도하고 있는 것일까? 갑자기 사라진 외할머니를 울면서 찾지 않고, 받아들이는 모습 같아서 더 슬퍼졌다.


얼마 전 지인의 남편이 독일 출장을 2주 다녀왔는데, 돌아오니 그동안 티를 내지 않던 아기가 아빠를 보는 순간 아빠 외치며 엉엉 소리 지르며 울었다고 한다. 우리 아기와 딱 하루 차이 나는 아가여서 그 이야기가 정말 인상 깊었다. 이제 내 아이가 보고 싶은 감정, 그리운 감정이 무엇인지 느끼는 시기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나 할까.


아이는 정말 아빠를 보고 싶어 했다. 아빠의 사진을 보여주면 한참 보면서 압빠, 압빠 중얼거렸고, 교회 예배를 드릴 때면 다른 아이의 아빠를 보고 압빠를 한 시간 동안 10번 이상 중얼거렸다.


오후 늦게 되어서야 아기는 비로소 보고 싶던 아빠를 만났다. 큰 반응은 없었지만, 아이의 눈빛이 아빠를 반가워하는게 느껴졌다.


말 못 하는 내 아이의 눈에 비친 말들이 느껴졌다.


'엄마, 아빠도 보고 싶고, 할머니도 보고 싶어.'


반복되는 이별이 아이의 마음에 굳은 살을 만들어줄까? 할머니와 아빠의 넘치는 사랑이 도리어 이별을 이겨나가게 하는 굳은 살이 되어줄까?


네가 하지 못한 말이 내 마음을 아프게 한다. 말을 하는 너보다 말을 하지 못하는 네가 나는 참 짠하다. 모든 이야기들을 속으로 속으로 하며, 가끔씩 아기 답지 않은 눈빛을 보여주는 너의 눈을 볼 때 엄마는 갑자기 울컥해지고는 한다.


나는 우리 아이에 대해 아직도 잘 모르는 것이 많다. 어쩌면 아이가 말을 배우게 되면 더 많이 알게 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내 아이의 눈빛 속에서 유난히 느껴지는 잔정을 보며, 아마도 이 녀석과 내 영혼은 참 많이 닮았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녀석이 안쓰럽고, 한 없이 그 등을 보듬어보게 된다.


11시. 아이는 요새 이 시간 즈음 대성통곡을 시작한다. 성장호르몬이 한참 나오는 시간이라는데, 아마도 이가 크고, 뼈가 크느라 힘든가 보다. 잠든 아이를 안고 등을 토닥이며, 아기의 이와 뼈에게 파이팅 메시지를 보낸다. 많이 아프지 많이 아플 거야 위로도 해본다. 말 못 하는 내 아이의 고통이라 더 아프다.


어쩌면 네가 하지 않은 말들이 나를 더 슬프게 한다. 하지만 나는 그 슬픔을 건너가 너에게 닿을 것이다. 슬픔에 매몰되는 것이 아니라 ’네가 아파서 너보다 더 아픈’ 이 고통을 이겨내는 단단한 엄마로 네 옆에 설 것이다. 네가 언제든 지친 등을 기댈 수 있도록. 그리고 그 등을 오늘처럼 한 없이 보듬어 줄 수 있도록.


사랑한다는 말도 부족한 내 딸아. 편히 자렴. 엄마는 너의 밤을 지킬게. 언젠가 네가 언어를 갖게 된다면 우리 서로 사랑의 언어를 더 많이 나누자꾸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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