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언컨대 아이들은 미숙한 게 아니라 예민할 뿐이고, 어른들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힘들게 살아가는 외국인일 뿐이다. -미학자 양효실
내가 좋아하는 작가인 은유의 신간 '다가오는 말들'이 나왔다. 문장 밀도가 높은 그녀의 에세이는 밑줄 그을 곳이 너무 많아 점점 밑줄을 포기하게 되는 매력이 있는데, 이번에도 두 번째 장에 위치한 이 문장을 읽고 마음이 쿵 내려앉는 느낌이 들었다. 이 문장은 미학자 양효실이 한 말이라고 하는데, 은유 작가는 이런 단락에서 이 문장을 꺼내어 들었다.
인권 강의에서 만난 한 청소년은 이런 말을 건넸다. "누가 작가님에게 여성이 글도 쓰고 대단하다고 말하면 어떻겠습니까?" 강의 중에 나는 청소년들을 직접 만난 경험을 얘기하면서 요즘 친구들 정말 생각이 깊고 훌륭하더라고 말했는데, 그 내용을 문제 삼았다. 듣고 보니 그랬다. 그건 청소년을 자기 생각과 의견을 가진 독립된 인격체로 존중하기보다 훈육의 대상으로 낮추어보는 시선에서 나오는 전형적인 기성세대의 말이었다.
소름이 돋았다. 당연한 것을 당연하게 보지 않는 시선. 그 시선은 살아가면서 정말 중요한 지혜이다. 누군가를 이해하는 데에 꼭 필요한 예민성이다. 훈육의 대상으로 낮추어진채 어린 시절을 보내왔기에 이미 아이들을 보는 내 시선은 굳어져 있던 것 같다. 내 아이를 낳아서도 마찬가지다. 그저 내 몸을 빌려 나왔을뿐 내 아이는 별개의 독립된 인격체인데, 나는 아이의 몸과 마음을 내 소유로 어느덧 주장하고 있었다. 마치 내 몸의 일부인양 말이다.
12개월이 된 내 아이는 점점 자기 정체성이 강해지고 있다. 특히 요즘따라 본인 기분이 나쁘다 표현할 때는 특유의 눈썹을 팔자로 만들고, 입을 동그랗게 만드는 표정을 통해 강한 아우라도 풍긴다. 위험하거나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는 행동을 제외하고는 특별히 제한할 필요가 없는 일이 많은데, 나는 아이를 지나치게 제한할 때가 많다. 워낙 보수적인 집안에서 엄격하게 자랐고, 기질 자체가 완벽성을 추구하는 기질이 많아서 스스로도 좀 강박을 가지고 살아가는 편이다. 내 자신에게도 그런데, 아이에게는 오죽할까. 아이를 되도록 자유롭게 키우려고 노력하는데도 타고난 기질이 자유롭지 않은 편이라 쉽지 않다. 그러나 이 꼬마 외국인도 만만치 않다. 엄마가 세워 놓은 많은 규칙을 넘나들고 부수는 재미로 사는 이 외국인을 통해 나 또한 그동안 떨치고 싶던 내 완벽주의를 고쳐나가고 있다.
육아를 한다는 건 내가 아이에게 무언가를 가르쳐준다는 의미는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육아는 도리어 '기를 육(育) 나 아(我)'로 보는 것이 더 맞다. 깨끗한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아이를 통해 그동안 여러 고정관념으로 인해 왜곡되게 바라보았던 세상을 향한 시선을 재정립하고, 좀 더 겸손하고, 좀 더 유연한 나로 다시 태어날 수 있는 기회인 것이다.
아마도 내 아이는 이제 점점 더 자신의 주장이 강해지고, 때론 말도 안되는 떼를 부려대며 내 화를 불러일으킬지도 모른다. 내 글을 좋게 바라봐주는 분들께서 가끔 내가 아이를 많이 이해해주는 좋은 엄마일거라 생각해주시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나는 그저 간장 종지만한 그릇밖에 안되는 부족한 소양을 가진 엄마이고, 아기의 고집에 화가 난다. 아이의 나이가 들어갈수록 이제 점점 더 화가 나고, 고민하는 일들이 늘어날 거라 생각이 든다.
그렇지만 내가 화를 내냐 안내냐가 중요한 문제는 아니다. 정말 중요한 문제는 그런 일시적인 감정의 반응이 아니라 내가 어떤 큰 물결을 품고 육아를 하느냐가 아닐까 싶다. 비록 오늘은 불합리한 화를 내어 마음이 아팠다 하더라도 기본적으로 아이를 독립된 인격체로서 존중하려는 마음을 가지고 노력한다면 나는 점점 더 나아질 것이다. 아픈 경험들은 다음 날을 위한 좋은 발판이 되어주고, 다음 날은 이전 보다 더 나아질 것이다.
건강에 관심이 많은 편이라 예전에 건강에 대한 강의를 들었었는데, 소장의 융털에 관한 이야기가 기억에 남는다. 융털이라는 작은 돌기는 소장에서 영양분을 흡수하는 역할을 하는데, 나이가 들고 안좋은 음식을 먹을수록 점점 더 무뎌져서 흡수율 또한 떨어진다고 한다. 좋은 식습관을 통해 융털이 잘 회복되는게 건강에 무척 중요하다는 이야기였다.
내 스스로의 말과 행동을 객관화하고, 현재 위치를 점검하는 예민성은 이 융털 같은 것이 아닐까. 세상을 향한, 내 아이를 향한 이 융털이 회복되어야지만 나는 좀 더 민감하게 상황을 받아들이고, 무의식중에 부정적으로 굳어지는 것들을 긍정적인 방향으로 바꾸어갈 수 있을 것이다.
오늘 읽은 이 말을 나는 내 육아관의 깊은 저변에 깔고 싶다. 내 아이가 미숙한 것이 아니라 예민한 존재이고, 나의 규범 속에서 어렵게 살아가는 외국인이라는 것. 그 외국인이 편안하게 우리집에서 잘 지내다 세상이란 또 다른 나라로 잘 떠날 수 있도록 우리집 복지 정책 개혁이 시급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