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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빗소리 Apr 17. 2019

냄비를 또 태워 먹었다

냄비를 또 태워 먹었다. 이번이 두 번째다. 요리하면서 아기를 함께 돌봐야 하는 일이 대부분인지라 둘을 동시에 해야 하는데, 나는 무언가를 동시에 한다는 것이 참 어려운 사람이다. 한 가지에 하나의 집중력을 가지기도 벅찬 사람이 두 가지 일을 동시에 하니 무엇 하나 제대로 되는 일이 없다. 아기와 놀아주다 주방에 갔다가 해야 해서 주로 삶는 요리를 자주 하는데, 아기 쫓아다니며 챙겨주다가 깜빡하여 냄비를 또 태워 먹었다.


갑자기 짜증이 밀려왔다. 눈물이 났다. 왜 나는 제대로 된 밥 하나 먹기도 이렇게 어려운 사람이 되어 버렸을까. 반찬이 없어 맛있는 반찬이 하나 있었으면 좋겠다 싶어 삶고 있었는데, 그걸 또 태워 먹으니 순간적으로 절망감이 들었다. 이 모든 상황들이 화가 나고, 밥만은 맘 편하게 먹고 싶다는 생각 때문에 슬펐다.


아기와 함께 있으면 아무것도 제대로 할 수가 없다. 그 사실을 당연히 받아들여야 하는데도, 가끔 이런 일이 생길 때마다 아무것도 제대로 할 수 없단 사실이 왜 이렇게 속상하게 느껴지는지 모르겠다. 그럼 아기를 재운 뒤에 하면 되지 않느냐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아기 재운 뒤 몇 시간은 정말 몇 가지 집안일만으로도 쏜살 같이 지나가버려서 모든 일을 다 해낼 수가 없다. 결국 아기와 함께 있을 때 해야 할 일들이 생겨나는 것이다.


지금 이 시기는 무언가를 제대로 해야 한다는 마음조차 내려놓아야 한다는 걸 머리로는 알고 있다. 하지만 그 사실을 알면서도 감정이 가끔 이렇게 널뛴다. 내 안에 이미 깊게 뿌리 박힌 완벽주의는 무엇 하나 제대로 마무리되지 못하고, 시장 좌판의 생선처럼 쭉 널려 있기만 하는 이 상황이 끝없이 답답하게 느껴질 뿐이다.


단 하나의 반찬이라도 맛있는 반찬을 놓고 마음 편하게 밥 먹기, 했던 일은 잘 마무리 짓기. 참 소박한 이런 일들은 아마도 아기를 가정 보육하는 동안은 쉽게 이루어지지 못할 일이다. 그만큼 아기를 키운다는 건 엄마의 작은 일상 조차 지켜내기 어려운 막중한 임무임에 틀림없다.


까칠해진 마음은 밖에서 식사만은 편하게 하는 남편, 자신의 일을 마무리 지을 여유를 가진 남편이 얄미워지는 나쁜 결과도 몰려온다. 남편은 아무 잘못도 없는데, 그냥 나 혼자 화가 난다. 무엇보다 어찌 보면 너무 사소하고 별 거 아닌 것처럼 보일 것 같은 내 고민을 남편이 깊이 공감할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슬프다. 몇 번 아이를 온전히 혼자 하루 종일 보게 하고, 나는 여행을 한 적이 있는데, 그런 경험이 조금은 육아의 어려움을 깨닫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는 생각은 한다. 하지만 그럴 때면 남편이 배달 음식을 시켜 먹고, 집안일은 전혀 하지 않고 아이만 돌보며 지내기 때문에 오늘 같은 날의 내 마음을 온전히 이해하기는 어렵지 않을까 싶다. 밥도 스스로 해 먹고, 집안일도 다 해놓으라 요구하기는 불가능하니까.


남편 일이 얼마나 힘든지 안다. 나도 밖에서 대인 관계 맺으며, 업무 처리하기에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던 사람이다. 하지만 육아에 뛰어들다 보니 차 한 잔 여유 있게 마시기도 어려운 이 상황만큼 힘든 일이 또 있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눈물이 나고, 한 없이 힘들다가도 또 이런 일을 잊게 하는 일도 생긴다. 오늘 내가 발 까진 상처를 소독하며 신음을 할 때 아기가 그 모습을 보더니 기어 와서 함께 슬퍼하며 나를 위로해주는 모습을 보여 감동받았다. 내 아픔을 누구보다 함께 하는 작은 생명체를 보는 기쁨은 세상에서 느낄 수 있는 경험 중 가장 진귀한 경험일 것이다.


그렇다. 육아는 힘듦과 행복이 밀물과 썰물처럼 오고 가는 삶의 치열한 현장이다. 힘들다가도 행복하고, 행복하다가도 힘들고. 어쩌면 당연한 삶의 모습인데, 육아는 그런 삶의 특성이 굉장히 짧은 주기로 축약되어 나타난다는 특성이 있다. 힘들고 행복한 감정이 굉장히 빠른 주기로 왔다 갔다 하니까 말이다.


아기를 키우는 게 너무 힘들다가도 아기가 내게 주는 행복이 너무 크다. 여러 노동으로 몸이 힘들어 한숨을 쉬다가도 아기가 금세 커버렸다는 사실을 발견할 때 아쉽다. 언젠가 아기가 커서 내 모든 육체노동이 거진 사라지고, 비로소 자유시간이 생길 때는 아마도 나는 너무나 늙어버리지 않았을까. 그리고 또 다른 자식 걱정으로 잠 못 이루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다 보면 그냥 지금 이 현실 또한 그저 감사해야 한단 마음이 든다. 아직은 젊은 나와 아직은 어린 내 아이. 오히려 내가 젊기에 이 힘듦을 감당할만한 체력과 정신력이 있다는 것에 감사하고 싶다.


태운 냄비는 아직 그대로 있다. 내 힘든 마음 또한 그곳에 남겨 두었다. 지금 내 삶의 모습을 꼭 닮은 그 냄비를 보며, 삶은 원래 이리 혼란스러운 것이리라 여겨본다. 혼란스러울 때는 그냥 혼란스러운 물결을 타고 넘실 넘실 살아가는 것만이 방법임을 생각하며. 난 그렇게 내 안의 고난과 춤춰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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