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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빗소리 Apr 23. 2019

어쩌면 오늘은 네가 가장 착한 날

무거운 눈을 감고,

무거운 마음을 뜨다.


힘겨운 어제였다. 하루의 무게만큼 무거워진 눈이 아이를 재우며 함께 감겼다. 해야 할 많은 과제들을 뒤로 한채. 무거운 마음을 뜨니 또 아침. 준비 없이하루가 시작되었다.


어제가 힘겨웠던 이유는 아이의 낮잠 문제가 크다. 예방 접종으로 인해 일상이 흔들려서인지 아기가 무려 10시간 동안 잠을 안 잤다. 새벽 6시부터 오후 4시까지 쉼 없이 아기를 돌보던 나는 몸과 마음이 지쳐버렸다. 그 와중에 틈틈이 아기 밥 만들고, 먹이는 것은 쉬는 시간 없어 더욱 힘든 일이었다.


답답한 마음으로 남편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기가 잠을 안 자."

"잠 안 자는 걸로 전화하는 거야?"


전화하면 안 된다는 걸 전화기를 드는 순간부터 알았다. 회사에서 업무 처리하느라 바쁠 텐데, 어쩌면 남편에게는 고작 그런 일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정말 누군가에게 그저 말하고 싶었다. 아기가 잠을 안 잔다고, 너무 지치고 힘이 드는데, 달리 방법이 없다고.


겨우 아기를 재우고, 저녁 식사 준비를 하니 다시금 아기가 눈을 떴다. 그리고 남편에게 메시지가 왔다.


"나 오늘 저녁 약속 있어."

"왜 하필 오늘?"


힘이 쭉 빠졌다. 그나마 남편 퇴근시간까지만이라도 버티자 하며, 체력을 쥐어짜던 중이었는데, 결국 아기가 잠들 때까지 다시금 힘을 내야 하는 상황이었다.


낮잠을 제대로 안 잔 것 치고는 아이가 잘 먹고, 잘 놀았다. 방긋방긋 웃으며, 나에게 까꿍까꿍을 연발하고, 밥 많이 먹어 볼록 나온 똥배를 등에 비벼대며 얼른 업어 달라 애교를 피웠다.


요새 제일 좋아하는 놀이인 소파 오르내리기를 땀 흘리며 하고 있는 아기를 보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지금은 아기가 가장 착한 때일 수도 있다고. 물론 '착하다'는 표현이 온전히 엄마 입장에서 말하는 거라 좀 거슬리긴 하지만.


두 돌 된 아가 엄마들이 말한다. 그래도 그때는 착한 편이야. 자기 고집 생기면 너무 어려워. 유치원 들어간 아가 엄마들이 말한다. 한 시간을 울다가 뚝 그치고 웃는데 너무 황당해. 이 고집을 어쩌면 좋을까. 초등학교 들어간 아이 엄마들이 말한다. 요새는 방에서 안 나온다. 외출하려 하면 자기는 두고 나가래. 벌써 품에서 떠나는 것만 같아.


수족이 자유롭지 못한 어린아이인지라 내가 아이의 수족이 되신 되어주니 몸이 매우 힘든 요즘이지만, 아이는 아직 마음속 자아의 눈이 완전히 열리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엄마의 주장을 온전히 받아줄 때가 많다. 하지만 이제 점점 아이의 자아가 눈을 뜨고, 자신이 하고 싶은 것들을 관철시키기 위해 나와 부단히 싸움을 하겠지. 아주 정상적인 발달이고, 그래야 하는 게 맞는 것이지만, 좁다란 마음 그릇을 가진 내가 아이를 넓은 마음으로 포용해줄 수 있을까 걱정이 되는 것도 사실이다.


어쩌면 오늘은 우리 아이가 가장 착한 날. 아직은 엄마의 말을 잘 따라주고, 방긋방긋 웃는 아가의 마음을 감사히 생각해야겠다. 몸은 조금 힘들어도 엄마를 이해해주는 이 고운 마음을 당연시 여기지 않아야겠다. 이 고마움이 적금처럼 쌓이면 언젠가부터 꼿꼿이 깃발을 세울 너의 자아를 조금은 넉넉히 존중해줄 수도 있겠지.


밀란 쿤데라는 그의 저서 '불멸'에서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기억은 영화가 아니라 사진이다.'


기억이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떠올릴 수 있는 영화가 아니라 몇몇 인상 깊은 장면만을 떠올리게 되는 사진이라니. 요즘 읽고 있는 심리학 책에서 이 문구를 인용하며 기억은 절정과 마지막에 크게 좌우된다 적혀 있었다. 육아 또한 부모들에게 행복했던 순간, 잘 자라준 아이에 대한 고마움 덕택에 아름답게 장식되는 것이리라 생각된다.


매우 지치는 하루였지만, 내게 어제는 방긋방긋 웃는 아이의 얼굴 사진으로 남았다. 오늘의 사진은 어떻게 남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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