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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빗소리 Apr 26. 2019

아이가 똑똑해서 좋으시겠어요

"아이가 똑똑해서 좋으시겠어요."


오늘 이 말을 두 번이나 들었다. 기분이 좋았겠다 생각하겠지만, 그렇지 않았다. 문장 자체로는 기분이 좋을 수 있지만, 상황적 맥락을 생각했을 때는 이 문장이 사실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초보 엄마라 영유아 검진에 대해서 잘 몰랐다. 우연히 주워들은 풍문은 최대한 늦게 가는 게 좋다는 것이었다. 지금 내 아이는 9~12개월 영유아 검진을 받아야 할 시기였다. 그렇다면 12개월 정도에 가야 검사에 유리하다. 엄마가 작성해야 하는 아이 발달 관련 검사지에는 9~12개월 아이들이 할 수 있는 행동이 적혀 있는데, 12개월 정도 되면 거의 모든 항목의 행동을 다 할 수 있으므로 모든 행동에 높은 점수를 받을 수 있다.


나중에 가야지 미루다 보니 호두가 내일이면 13개월이다. 일부러 그런 건 아니다. 영유아 검진 자체를 그저 잊어버리고 있었다. 부랴부랴 5일 전에 갔더니 영유아 검진을 하지 않는 날이란다. 그래서 영유아 검진이 가능한 마지노선인 오늘에서야 가는 대담한(?) 엄마가 되었다.


아이 발달 관련 검사지 항목을 보니 이건 뭐 거의 만점이다. 아이가 못하는 게 없다. 하긴 내일이면 13개월에 들어가는 아이가 9~12개월 정도에 가능한 행동을 하는 게 그리 신기한 일도 아니다.


"아이가 이 또래 아이들과 비교할 때 모든 것을 참 잘하네요. 좋으시겠습니다."


의사 선생님은 형식적인 문항 분석을 해주셨다. 그렇게 말씀하실 수밖에 없는 검사지였다. 그래서인지 나도 별 다른 감흥이 없었다. 다만 아이의 정상 발달을 점검한다는 이유로 모든 아이를 똑바로 1등부터 100등까지 줄 세우는 이 상황이 슬펐다. 키가 작거나, 몸무게가 너무 적게 나가거나, 혹은 너무 많이 나가거나, 머리가 너무 작거나, 너무 크거나..... 그걸 왜 그리 걱정해야할까. 사람마다 외형은 모두 다른 것인데, 대체 평균이란 게 무슨 의미일까? 머리가 적당히 작고, 무게도 적당히 건강하게 살집이 있으며, 키가 적당히 큰 모델 같은 아이가 있다 치자. 그래서 어쩌라는 것일까. 그게 아이의 삶에 뭐 그렇게 큰 의미가 있을까. 설사 의미가 있다 치더라도 그 의미 때문에 아이가 기죽어 살 필요는 없다.


내가 어릴 때는 이런 것도 없이 그냥 컸다고 한다. 나는 어려서부터 내가 키가 얼마나 작은지, 혹은 얼마나 말랐는지 잘 모르고 살았다. 처음으로 서열이란 것을 경험했을 때는 초등학교에 들어가서였다. 줄에서 제일 앞에 서야 했을 때의 내 기분이란. 키로 인해 처음 경험해 본 슬픔이었다.


이제 겨우 돌 된 녀석에게 비교라는 잣대를 들이민다는 것에 아쉬움을 느낀 검진을 끝내고 오후에는 도서관에 갔다. 집에서 매일 엄마랑 노는 것이 신물이 난 녀석인지라 도서관 아기 책 코너에서 신나게 바닥을 기어 다니며 곳곳을 구경했다. 그러다 호두 나이 또래의 아이를 만났다. 10개월이라고 한다. 호두가 내일이면 13개월이니 3개월 정도 차이가 난다.


아이들이 만나다 보니 엄마들도 서로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아기 엄마가 계속 부럽다, 우리 아이는 이걸 못한다, 너무 속상하다는 이야기를 했다. 아이가 똑똑해서 너무 좋겠다, 어쩜 저리 많은 것을 할 수 있냐 말했다. 발달이 좀 느리고, 몸무게가 너무 많이 나간다는 그 아이는 내가 볼 때는 지극히 정상적인 속도의 발달을 보이는 것 같았다. 그래서 우리 아이도 그랬다, 돌 되기 직전 몇 주가 정말 확확 크고, 많이 달라지더라 너무 걱정 마시라고 위로했다. 지금 개월 수가 좀 앞서 나가니 그렇게 보이는 것뿐이다 계속 말씀드렸는데도, 아이의 느린 발달에 대한 속상한 이야기들이 이어진다. 반복되는 부정적인 이야기에 내 기분도 축 처졌다.


나 또한 우리 아이와 비슷한 개월 수인데도 불구하고 빠른 발달을 보이는 아이들을 만날 때나 이야기를 들을 때 그런 기분이 들기도 했다. 왜 우리 아이는 이런 걸 못하지, 왜 걸을 생각이 없을까, 왜 이런 말을 못 할까. 끝도 없는 비교 속에 마음이 점점 옥죄어 들은 적이 꽤 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거리가 멀고, 비교할 아기도 별로 없는 시골에서 산다면 내가 좀 더 편안해질 수 있을까? 그래 봤자 내가 첫 좌절을 경험했던 그 순간처럼 우리 아이에게도 첫 경험은 반드시 온다. 피한다고 피해봤자 집합교육이 시작되는 나이에는 어떻게든 경험하게 되는 일이다.


그럼 어떻게 하면 비교라는 은근한 폭력 속에서 내 아이와 나를 보호할 수 있을까. 오늘 두 가지 일을 겪으며, 그리고 요즘 읽고 있는 두 가지 책을 떠올리며 생각해보았다. 내가 요즘 읽고 있는 책은 '실격당한 자들을 위한 변론', '아이가 잠들면 서재로 숨었다'이다. 두 저자가 서로 다른 상황인데도, 한 목소리로 말하는 이야기들이 있어 신기했다. 그것은 바로 '바라보기'이다. 그것도 한 발자국 떨어져서 말이다.


누군가에게 갑자기 비난을 받을 때, 혹은 과한 칭찬을 받을 때. 그러니까 누군가에 의해 좋든 나쁘든 강한 자극을 받게 될 때는 지금 그 이야기를 듣고 있는 나로부터 내 본질의 나를 분리한 뒤 멀찍이서 바라보라는 것이다. 본질의 나는 그 누구의 칭찬이나 비난에도 흔들리지 않는다. 흔들리는 건 지금 그 이야기를 듣고 있는 또 다른 나일뿐이다. 그런 식으로 본질의 나는 그 어떤 말로도 손상할 수 없는 고유한 나로 남겨둔 채 남의 이야기를 듣듯 넘어가라는 것이다. 방식은 좀 달랐지만, 우연히 보게 된 서로 다른 책의 두 저자가 똑같은 이야기를 하니 참 신기했다. 나에게 꼭 필요한 메시지인가 보다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나는 그게 가능하지만, 아직 어린 이 아이는 아직 할 수 없는 일들이다. 그렇다면 내 아이는 어떻게 이 비교의 굴레 속에서 흔들리지 않고 건강히 자랄 수 있을까. 곰곰이 생각해보았는데, 끊임없이 아이의 고유성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이야기를 해준다면 어떨까 싶다. 넌 고유해, 이 넓은 세상에 너같은 사람은 단 한 명밖에 없어. 그런 말로 흔들리기에는 너란 존재는 소중해. 사람은 누구에게나 장단점이 있어. 단 한 면만 보는 사람들의 이야기에 너무 귀 기울이지 말자.


사실 이 이야기는 나에게 해주고 싶은 이야기다. 비교로 인한 아픔에 아무런 면역력 없이 아파해야 했던 나는 참 힘들었다. 아이가 똑같은 아픔을 겪는다는 것은 상상하기가 싫다. 아이는 조금은 덜 아팠으면 좋겠다.


이렇게 말하는 나조차 가끔 생각 없이 아이들을 비교하는 종류의 말을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비교가 얼마나 좋지 않은 의사소통의 방법인지를 잘 인지하고, 아이를 위해 늘 조심하며 말해야겠다.


 "아이가 똑똑해서 좋은 게 아니라 그냥 좋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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