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도서관에 갔을 때의 일이다. 사서님께 예약 도서를 건네받은 나는 습관처럼 그분의 뒤 이동 책꽂이에 꽂혀 있는 예약 도서 목록을 훑었다. 나의 시선을 보통 부담스러워하는 경우가 많아서 어떤 책이 요새 인기 있는지가 궁금하다며 사서님들께 양해를 구하고는 한다.
그분은 갑자기 이동 책꽂이를 쭉 끌어오더니 내 바로 앞까지 가져왔다.
"아기도 안고 있는데, 가까이에서 보셔야죠!"
자신감 있고, 건강하게 느껴지는 말투가 기분이 좋았다. 이 배려 또한 놀라웠는데, 그분은 바로 이 책 저책을 꼽으며 설명해주셨다.
"요즘은 이 책이 인기가 많아요. 음, 이 책도 자주 보시더라고요? 여기 말고도 안내 데스크 바로 옆의 이동식 책꽂이는 주로 인기도서가 꽂혀 있는 경우가 많으니 눈여겨보시고요."
요즘 말로 TMI라고 할만한 자세한 정보를 열심히 알려주셨다. 나는 메모라도 할 기세로 열심히 고개를 끄덕이며 그분의 설명을 듣고 있었다.
"아, 그리고 이 책도 진짜 재밌어요! 그런데 제가 대출 중이니 예~약하셔야 볼 수 있어요."
사서님이 보고 계신 책은 김영하의 소개로 뜨고 있는 '내 어머니 이야기'였다. 예~약이라고 말할 때 리듬감까지 넣어 말하는 그분의 위트에 함께 웃었다.
이렇게 인기 도서에 대해서 자세하게 설명해준 사서님은 처음이었다. 그렇다고 모든 사서님들이 이분처럼 되기를 바라진 않는다. 각자의 성향대로 살아가는 것이기에. 모두에게 고객 대응의 평균을 상향으로 올려 똑같이 행동하길 바란다는 건 각자의 성향을 무시하는 처사란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내가 이분을 인상 깊게 보게 된 건 단지 내게 베푼 친절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분에게 느껴지는 자기 직업에 대한 철학 때문이었다. 중년의 이 사서님은 아마도 신규 때부터 지금까지 치열하게 자신의 직업 철학을 세우기 위해 많이 고민하고, 눈물 흘리지 않았을까 싶다. 무례한 이용자들에게 상처 받고, 불합리한 업무에 힘들어하는 시간을 보냈을 것이다. 그런 시간들을 통해 그 안에서 나의 위치를 어디쯤 잡아야 할지, 이용자들이 나를 어떻게 대하거나 말거나 내가 어떤 방식으로 그들을 대할지에 대한 선택 등 아마도 많은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그리고 그런 생각의 끝에 지금의 철학 어린 행동이 나오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내가 본 그녀는 자신의 직업 철학을 확고히 가지고, 나의 반응에 상관없이 자신이 하고 싶은 행동을 선택해서 자유롭게 행동했으며, 그 행동 속에서 그 철학이 자연스레 느껴졌다.
어떤 일을 하던 나의 철학을 갖는다는 것은 정말 중요한 일이다. 나라는 사람이 살아오면서 겪은 많은 이야기들과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일의 조화 속에 적절한 위치를 잡고, 기준을 세우는 건 오직 나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누구도 내 삶 같은 삶을 살아온 사람은 없고, 누구도 내 성격과 똑같은 사람도 없다. 내가 겪은 이야기, 나의 성격은 나의 일에 많은 영향을 줄 수밖에 없다. 그들의 조화가 어찌 이루어질지를 결정하는 것은 그래서 중요하다.
특히 엄마에게는 철학이 필요하다. 그 철학에서 가장 기본 출발점이 되어야 할 것은 내가 어떻게 커왔는지일 것이다. 육아에 있어서 내 부모를 완전히 배제하고는 이야기가 되지 않는다. 내가 양육받아온 방식, 내 부모의 성향은 내 육아에 있어서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 그 방식이 옳던 옳지 않던, 내 부모의 성향이 마음에 들던, 들지 않던 말이다.
내가 커온 방식에서 나는 어떤 점이 좋았고, 어떤 점이 힘들었는지와 내 성격에서 나는 어떤 점이 강하고, 어떤 점이 약한지를 정확히 파악하는 것에서 엄마의 철학은 시작된다고 생각한다. 육아서의 엄마들, 내 주변의 엄마들과 다른 나. 나의 강점과 약점. 내 고유성을 온전히 받아들이고 나만의 육아를 시작하는 것이다.
나를 향해 쉴 새 없이 시작되는 부모님들과 웃어른, 주변의 친구들의 조언을 적절히 필터링하고, 내 몸과 마음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는 육아를 할 때 나는 행복할 것이다. 세상에 좋은 엄마로서 아이에게 해줘야 할 것은 무척 많지만, 나는 모든 걸 해줄 수는 없는 엄마이다. 내가 해주고 싶고, 해줄 수 있는 것만 선택하여 최선을 다하는 것만으로도 대단한 일이란 생각이 든다.
10개 중에 2개만 한다 해서 8개는 왜 안 하냐는 식의 말은 듣지 않기로 한다. 2개만 해도 내 그릇에 얼마나 대단한 일인데, 나머지 8개라니! 당신은 그런 엄마가 되어 주었나요? 원래 남의 말은 쉽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남자들의 군대처럼 내 육아가 최고인 것이다. 때론 상처 받았던 그런 말들에 조금은 의연해지고 싶다. 나는 2개나 할 수 있다고요라고 마음속으로 외쳐대며.
엄마라는 보편성을 버린다. '.... 해야 한다'는 강요를 외면한다. 아이와 나의 관계는 오로지 단 하나, 우리만의 특수한 관계이니 우리에게 맞는 삶의 규칙이 필요함을 인정하고 실천한다.
- 아이가 잠들면 서재로 숨었다, 김슬기
이 세상에 하나뿐인 나와 이 세상에 하나뿐인 내 아이. 그리고 하나뿐인 우리의 관계. 이 관계 속의 규칙은 우리만이 정할 수 있는 것이다. 아무도 우리가 대신되어줄 수 없다. 우리의 관계에 감 놔라 배 놔라 하는 사람들은 우리 사이의 깊이 있는 이야기의 뿌리를 모른 채 수박 겉핥기 식의 조언만 해줄 수 있을 뿐이다.
그래서 엄마의 철학은 필요하다. 다른 직업들과 달리 육아라는 직업은 특수성이 무척 강한 직업이기에 이 철학의 광산은 오로지 나만이 캘 수 있다. 그 광산에서 보석을 발견하고, 간직하는 것은 오로지 내 몫이다.
어떻게 나의 철학을 만들어갈 수 있을까? 나는 내 안의 나와 내 아이를 끊임없이 관찰하며 생각한다. 판단을 뒤로하고 일단 관찰해본다. 나는 이게 좋구나, 싫구나, 내 아이는 이게 좋구나, 싫구나. 내가 좋아하고, 아이도 좋아하는 교차점에서 철학을 시작해본다. 우리는 이 방식이 맞아!
또 책이 많은 도움이 되었다. 하루에 단 한 장이라도 읽었던 책의 문장들은 고여 있는 내 세계에 작은 물결을 일으켜주고, 물결은 곧 생각에 생각의 꼬리를 물게 하여 내 작은 세계를 흔든다. 흔들린 세계는 이전의 세계보다는 좀 더 세상을 향해, 내 아이를 향해 부드러운 시선을 갖게 한다.
엄마처럼 바쁜 직업에 책까지 읽어야 하는 건 참 힘든 일이다. 어제 독서에 대해 묻는 친구들과도 이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어느 책에서 본 이야기이다. 한 가지 행동을 습관을 들이려면 적어도 3달 넘게는 노력해야 한다고 한다. 하루에 자기 전에 10분만 책을 읽는 행동을 3달 동안 반복하면 그 행동이 어느 정도 습관으로 자리매김한다는 것이다. 나 또한 바빠서 책과 몇 달 멀어질 때는 다시금 가까워지도록 이 방법을 쓰고 있다.
이처럼 관찰과 독서를 통해 만들어진 엄마의 철학은 육아에 있어서 좋은 등대가 되어줄 것이란 생각이 든다. 사서님의 그 자신감 있는 행동을 통해 내가 감명을 받았듯 나의 자신감 있는 육아는 나의 아이에게 좋은 자극이 되어 줄 것이라 믿는다. 나의 유일한 고객이자, 영원한 고객인 나의 아이에게 말이다.
나는 일단 나부터, 그리고 이 글을 읽고 있는 엄마들도 함께 모두 철학을 가지자 말하고 싶다. 육아를 통해 배우는 철학은 아이만을 위한 공부가 아닌 그동안 살아온 내 삶에 대한 연말 정산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아이라는 귀한 선물을 통해 나는 내 삶을 한 번 돌아보고 정비하는 시간을 갖는다. 그렇게 하여 갖게 되는 나의 철학은 육아에, 그리고 앞으로의 삶의 후반전에 좋은 자양분이 될 것이다. 철학을 가진 사람은 매력 있다. 철학을 가진 엄마는 두 몫의 철학을 가지고 있기에 더욱 아름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