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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빗소리 May 09. 2019

위대한 유산

"엄마가....."


한 때는 ‘엄마가'로 시작되는 말이 싫었다. 나의 독립성을 가로막고, 엄마의 의지대로 가야 하는 이 말이 버겁게 느껴지곤 했다.


긴 연휴 동안 집안 구석구석을 쓸고 닦으시며, 딸의 집을 두루 살피신 엄마께서는 '엄마가'로 시작된 문장을 꺼내셨다. 아기 요리해주느라 자기 밥은 뒷전인 딸이 걱정도 되고, 요즘 들어 자주 아프니 마음이 쓰이셨나 보다.


'엄마가 이런 이런 밑반찬 해올게.'

'엄마가 다음에 그 물건 구해올게.'

'엄마가 다음에 올 때는 여기 치워줄게.'


'엄마가'라는 말을 오랜만에 들어서인지 한 때는 싫기까지 했던 그 말이 정겨웠다. 한 생명을 오롯이 키워내는 무게 때문이었을까. 나는 많이 지쳐있었고, 내게도 엄마가 필요하단 생각을 해온 요즘이었다. 내 아이의 '엄마'가 아닌 나의 '엄마'로서의 '엄마' 소리가 듣고 싶었다.


엄마 되기란 모두에게 어렵고 버거운 일이지만, 엄마의 '엄마 됨'은 유난히 쉽지 않았다. 가난한 집에 태어나고, 가난한 집에 시집와 숱한 고생을 하셨다.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더 가난해진 엄마는 육아보다 가난과의 싸움이 더 힘들었던 분이다. 그 가난이 자식의 앞길을 가로막을까 봐 두려움에 떠셨다. 가사도우미, 청소도우미, 미용실 보조, 방앗간 보조, 24시간 식당에서 심야에 일하기 등 일일이 나열할 순 없지만 엄마가 해보지 않은 일을 꼽기가 어려울 정도로 많은 일을 하셨다. 건강에 대한 고민조차 사치일 정도로 몸을 가리지 않고 일을 하셨다 한다. 고된 일상을 보내고 나면 생각할 겨를도 없이 잠이 들고, 엄마의 고된 하루는 야속하게도 다시 시작되었다.


삶은 왜 그리 잔인할까. 그렇게 물불 가리지 않고 열정적으로 가난을 떨쳐내려 노력하셨던 어머니께 찾아온 것은 희망이 아닌 절망이었다. 갑작스러운 아버지의 죽음, 40대의 젊은 나이에 찾아온 퇴행성 관절염. 가장의 빈자리를 메꾸려면 더 일을 해야 할 상황이었지만, 건강 악화로 이제 고된 일을 하실 수 없는 몸이 된 것이다.


엄마는 잠을 주무실 수 없었다 한다. 절망스러운 시간을 외면해보려 잠이 올 때까지 차를 끌고 밤새 운전하다가 지쳐 잠이 드는 날들이 반복되었다. 그 무렵 나 또한 고3 수험생으로서 내 앞의 삶이 너무 매서워 엄마를 돌볼 겨를이 없었다. 서로를 외면하는 나날이 계속되었다. 점점 엄마와의 골은 깊어져 갔다. 서로가 모르는 시간이 늘어가고, 서로 알 수 없는 이야기가 쌓여갔다.


시간은 흘렀다. 어디서부터 다시 관계의 단추를 여며야 할지도 가닥이 잡히지 않은 채. 다만 엄마에 대한 기도만은 멈추지 않았다. 어느 날 새벽기도회에 가서 엄마 기도를 하는데, 엄마의 어린 시절에 대한 묵상이 저절로 되었다. 어린 시절 가난으로 인해 섬에 있는 친척집에 맡겨진 엄마는 노을 지는 바닷가를 바라보며 그렇게 매일 울었다 한다. 아직도 노을이 두려운 엄마 이야기를 들었던 기억 때문인지 기도 중에 바다를 바라보며 우는 한 소녀의 그림이 마음 가득 그려졌다. 함께 눈물이 났다. 엄마가 느낀 외로움의 깊이가 내게도 시리게 느껴졌다. 그 시리고 어두운 날을 겪었을 어린 마음을 생각하니 가슴이 미어졌다. 어린 엄마를 꼭 안아주고 싶었다. 여전히 녹록지 않고, 여전히 외로운 엄마의 삶도 함께.


엄마도 나와 똑같이 약하고 외로운 사람일 뿐인데, '엄마는 엄마니까 다 견뎌야지'라는 말도 안 되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저 이제껏 그래 왔던 것처럼 꿋꿋이 버텨주시길 바랬다. 엄마의 힘듦과 외로움은 알아서 이겨내 주시길 소망했다. 그렇게 이기적인 딸이었다.


엄마가 되어보니 엄마의 힘듦과 외로움이 더 깊이 다가온다. 인생의 무대에서 주연의 자리를 딸에게 내어주고, 조연의 역할을 착실히 해낸다는 것이 이렇게도 힘든 일인 줄 미처 몰랐다. 잠시 잠깐 내어준 주연의 자리이고, 딸의 무대가 완성되면 곧 딸이 떠날 것임을 알지만, 부족한 나는 잠깐의 조연도 참 힘이 들다. 여전히 주연을 향한 꿈틀대는 욕망과 조연 역할의 고됨이 나를 지치게 하곤 한다.


나를 위해 자신의 자리를 넉넉히 내어주었던 나의 엄마. 오랜 시간 동안 조연 역할을 충실히 해주며 딸의 무대가 멋지게 완성되길 기다려준 엄마. 엄마의 사랑과 헌신 덕에 나는 멋지게 무대에 올랐고, 내게 맡겨진 역할을 충실히 해낼 수 있었다.


부모님께 물려받은 물질적인 유산은 없지만, 나는 위대한 유산을 받았다. 삶의 모진 비바람을 온몸으로 막아주던 엄마의 사랑은 어떤 물질적 유산보다도 오래 내 가슴속에 남을 것이다. 바닥을 딛고 올라섰던 엄마의 의지는 이제 내 의지가 되어 살면서 겪을 많은 시련에도 다시금 일어설 용기가 될 것이다.


어버이날을 맞아 엄마께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가장 위대한 유산을 딸의 가슴에 깊이 남기신 나의 엄마가 자랑스럽다. 나 또한 딸의 가슴에 잊혀지지 않는 유산을 물려줄 엄마가 되길 바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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