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기에게 저녁 식사를 먹이고 있는데, 전화 진동이 울린다.
"떡볶이, 김밥, 쫄면?"
결혼 9년 차 부부의 통화는 바로 본론부터 들어가는 단계에 돌입한다. 단순하다 못해 정갈한 대답까지.
"응!"
전화가 끊기고, 아무 일도 없다는 듯 다시 아기 밥을 먹인다. 곰곰이 통화를 되짚어 본다. 세 단어가 마치 이렇게 말하는 것만 같다.
"사랑해, 미안해, 고마워!"
몇 주째 어지럼증으로 고생을 하는 나를 바라보며, 남편은 많은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씩씩하고 건강해 보이던 아내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가 되어 버렸으니 남편도 얼마나 답답했을까?
당연했던 집밥이 점점 걱정거리로 돌변했나 보다. 집밥을 먹지 않으면 아내가 조금은 더 쉴 수 있지 않을까 싶은 생각에 스스로 밥을 마련해오기 시작했다.
떡볶이, 김밥, 쫄면. 내가 가장 좋아하는 식당에서 가장 즐겨 포장해오는 주요 메뉴다.
떡볶이, 김밥, 쫄면. 네가 좋아하는 걸 가져갈 테니, 너는 그저 즐겁게 먹고 편하게 쉬어라는 의미다.
떡볶이, 김밥, 쫄면. 나는 네가 무척 걱정스럽고, 너를 위해 변하고 싶다는 마음이다.
남편 덕분에 편히 밥을 먹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떡볶이, 김밥, 쫄면을 못 먹는 우리 아가의 설거지 거리는 쌓였다. 남은 설거지를 마무리하고 있는 나에게 남편이 주머니에서 초코렡을 꺼낸다. 내가 좋아하는 트윅스라는 초코렡이다.
사실 어제 남편이 운동하러 갈 때 트윅스와 사이다를 사달라고 부탁했었다. 손이 큰 남편이 여러 개 사올까봐 꼭 딱 한 개만 사다 달라 간곡히 부탁했다. 아토피가 있는 나는 인스턴트를 먹으면 피부가 안 좋아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끔씩 먹는 이유는 좀 안 좋아지더라도 먹는 즐거움을 누리고 싶어서다. 할 수 없이 소량만 먹는데, 남편은 꼭 여러 개를 사 와서 내 자제심을 흔든다. 어제는 부탁이 마음에 걸렸는지 딱 한 개만 사와서 맛있게 먹었다.
갑자기 튀어나온 트윅스를 보니 웃음이 나온다. 아내가 좋아하는 초코렡을 더 사주고도 싶고, 한꺼번에 먹으면 또 아토피 때문에 고생할까봐 주머니에 숨겨 놓은 것이다.
남편은 연애할 때도 가끔 우리 집에 자기가 사온 선물을 뜬금없는 곳에 툭 숨겨놓고 가서 청소하다가 나를 놀라게 하곤 했다. 소파 쿠션 뒤에 숨은 선물을 보며 어이없이 웃었던 12년 전의 내가 떠오른다. 트윅스가 연애의 기억을 되살려줬다. 그래, 내가 이 남자의 이런 모습을 참 아끼고 사랑했었지.
생활에 지쳐 남편이 지나가는 행인 1로 보일 때가 있다. 본인의 야근과 회식으로 내 육아 업무를 과중시키는 나쁜 사람으로만 보일 때도 있다. 내가 사랑했던 그 남자에 대한 보송한 기억이 거친 생활의 물결에 휩쓸려 가물가물할 때가 많다.
아이는 떠나지만, 남편은 남는다. 떠나보내려 아이를 키우는 것이고, 함께 하려 남편과 맞춰가는 것이다. 당장 내 눈 앞에 팔딱팔딱거리는 아이의 존재에 압도되지 않고, 오히려 더 중요할 수 있는 남편과의 관계를 잘 지켜나가는 것이 참 중요하단 생각이 들었다. 여전히 나는 정신을 못 차리고 있지만 말이다.
떡볶이, 김밥, 쫄면?
나도 사랑해, 여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