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면서 겪었던 수많은 무례함을 되돌아본다.
나의 나됨을 못남으로 치부했던 말.
현재의 모자람으로 내 꿈까지 무시했던 말.
아직 경험해보지 못해 그렇다며 나의 감정을 뭉개던 말.
그 모든 무례함에 대한 내 대답은 늘 '당황'이었다. 당황하며 머릿속이 하얘진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말 그대로 일시 정지가 되어 그 상황을 받아들였다. 이제야 할 말이 생겨나면 이미 그 사람은 멀리 떠난 후였다. 집에서 이불을 걷어 차고, 이를 득득 갈며 복수를 꿈꾸지만, 이미 지나간 기차를 붙잡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문제는 아무리 당해도 어쩌면 그렇게 처음 겪는 것처럼 당황하는지!
무례함을 돌아보다 이런 생각이 들었다. 당신의 무례함보다 더 무서운 것은 무례한 발언에 내가 익숙해져 간다는 것이었다. 무례한 발언에 반기를 들기는커녕 '그래, 어쩌면 그 말이 사실일지도 몰라.'라는 생각으로 내 자신을 비하하고, 그 무례함을 받아 마땅하다며 받아들였던 건 아니었나 생각해본다.
당신의 무례함을 늘 생경하게 받아들이고, 끊임없이 반기를 들었어야 했다. 나는 여전히 팔딱팔딱 살아 숨 쉬고, 누구도 나를 침범할 수 없다는 것을 증명해야 했다. 언제부터 나는 그저 무례한 돌에 가만히 맞는 사람이 되었을까.
오늘 친구와 책에 대해서 함께 이야기를 나누다 내가 그동안 당했던 모든 무례함에 대해 얼마나 관대했는지를 생각했다. 오래된 무례함에 내 마음도 빛바래져 무엇이 무례한지조차 점차 잊고 있었다.
나는 나다. 누구도 나에게 내가 아닌 것을 강요할 수 없다. 하나님은 나를 세상에 하나뿐인 존재로 창조하셨고, 나는 나의 고유성을 잃지 않고 살아가야 한다. 나를 평가하는 말에 대해 휘둘리면 안 되었다. 나는 나만의 역사를 만들어 가는 사람이고, 그 역사는 누구와도 똑같지 않다. 누구와도 비교될 수 없다. 좋은 조언도 있겠지만, 조언으로 위장한 깎아내림에까지 위축되면 안 되었다.
아기가 자신을 고유한 존재로 인식하고, 자신의 부정적 감정까지 건강하게 표현하게 하기 위해서는 일단 나부터 그렇게 되어야 한다. 엄마로서의 내 모습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남이 가진 색깔을 부러워하지 않고, 내가 가진 색깔에서 최대한 원래 색깔에 가깝게 살 수 있도록 부단히 노력하고 싶다. 나는 나일 때가 가장 아름다우니까 말이다.
지금은 나의 색을 찾을 때. 남들의 무례함에 허물어지지 않을 내 울타리를 견고히 만들어야 할 때.
호두를 통해 나는 좀 더 용감한 투사가 된다. 엄마라는 이름의 투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