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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빗소리 May 27. 2019

아주 진부한 이야기

시부모님께서 갑자기 집에 놀러오셨다. 20분 거리에 사는 우리 집에 평소에는 부담 될까 거의 찾아오시지 않고, 오늘처럼 계획 없이 오시는 적은 더욱 없기에 처음에는 당황스러웠다. 엉망진창의 집을 치우면서 당황스러운 마음이 차츰 가라앉고, 얼마나 아기가 보고 싶으면 약속도 없이 급하게 오실까 하는 마음으로 옮겨졌다.


시부모님이 오시자 아기는 매우 흥분 상태로 돌변했다. 낯을 많이 가려서 밖에서는 얼음 공주인 우리 아가는 그만큼의 에너지를 가족들을 위해 꼭꼭 숨겨 놓는지 가족들에게는 늘 흥분 대폭발이다. 할아버지와 할머니 사이를 왔다 갔다 걸어다니며, 온갖 애교를 부렸다. 할아버지에게는 쪽 소리가 날 정도의 진한 뽀뽀를 몇 번이나 해드려서 할아버지가 이게 손주 보는 기쁨이지라며 감탄하셨다.


불과 한 달 전까지만 해도 데면데면하던 할아버지, 할머니에게 이리도 친근감을 표시하는 아기가 신기했다. 이제 할아버지, 할머니를 완전한 제 가족으로 받아들인 것 같다. 남들과 가족의 구분선이 다른 아기들보다 조금은 진한 아이라 기간이 더 오래 걸렸던 것 같다.


아이는 많이 웃었다. 내가 사랑을 받고 있다는 확신과 나는 사랑 받을만한 자격이 있는 사람이라는 자부심, 사랑을 즐길줄 아는 여유가 느껴졌다. 근래에 본 아기 모습 중에 가장 행복한 기운이 느껴졌다고나 할까.


시부모님 또한 행복해보였다. 9년 동안 내가 시부모님을 이 정도로 웃게 해드렸던 적은 없던 것 같은데, 정말 즐거워 보이셨고, 깊은 행복감을 표현하기도 하셨다. 무엇보다 아이가 할아버지, 할머니를 자기의 가족을 받아 들였다는 사실에 기뻐하셨다.


어제 읽은 책에 사랑의 기억은 아기의 마음에 적금 통장 같은 것이란 표현을 보았다. 아기가 살면서 힘이 드는 순간을 만날 때 그 적금 통장을 꺼내어 이겨내는 것이라 했다. 우리 아기는 오늘 신나게 적금을 부었을까? 그 적금을 언젠가 꺼내게 되는 날이 올까?


아기에게 내가 해줄 수 없는 부분이 있다는 것이 실감나는 하루였다. 훈육이 빠진 사랑은 자유롭다. 책임이 없는 사랑은 즐겁다. 사랑이란 행위 그 자체에 좀 더 온전히 초점을 맞출 수 있다. 아이를 그저 사랑하기만 하면 된다는 마음으로 바라보는 시부모님의 사랑은 아기에게 좀 더 깊숙히 다가갔을 것이라 생각한다. 내가 해줄 수 없는 사랑이었다. 엄마에게 훈육과 책임이 빠진 사랑은 쉽지 않은 것이므로.


저녁식사를 시켜먹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래도 쌓인 설거지 거리와 수많은 쓰레기들을 치우며 또 다른 노동에 힘들었지만, 가족들이 준 행복한 기운에 나도 즐겁게 일을 잘 해낼 수 있었다.


'시부모님께서 아이를 예뻐하더라.' 한 문장으로 요약될 이 글은 어쩌면 매우 진부한 글이 될 수도 있다. 오늘 느낀 사실은 진부하게 느껴졌던 남의 이야기가 막상 내 이야기가 되고 보니 말로 형언할 수 없는 깊은 감정이 생기더라는 것이다. 아기를 낳는 경험, 키우는 경험은 이 세상에서 가장 오래되고 진부한 이야기다. 하지만 개인에게는 매우 특별한 경험이고, 삶을 뒤흔들 정도로 엄청난 경험이 된다.


아이와 시부모님이 보여준 서로를 향한 눈빛은 내 마음에 오래 각인이 될 것 같다. 깊은 사랑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인다. 그 사랑의 순간을 함께 할 수 있어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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