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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희주 Apr 14. 2022

개인 위생에 주의하세요

다르게 생겨먹은 모녀의 세상 모든 일 각자 리뷰 : 파워 오브 도그

엄마 (68년생)

/ 나이 들면서 '성질 오브 도그'가 새 나올까 노심초사 1인.


성장영화라는 게 있다.

주인공이 이런저런 일을 겪은 끝에 영화가 끝날 때쯤엔 한 뼘 혹은 그 이상 훌쩍 성장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영화. 성장을 해야 하기 때문에 주인공은 미성숙 혹은 결핍이 기본이다. 대개 주인공은 어린이 혹은 청년이고, 우리는 그 어린이 혹은 청년의 성장에 박수를 보내거나 그가 겪는 성장통에 공감하며 가슴이 뻐근해진다.

그런데 이번에 만난 미성숙의 주인공은 어린이 혹은 청년이 아니다. 눈가엔 잔주름이 가득하고 맨손으로 소의 거세 작업을 하는 어른, '필'이다.


필은 최고의 카우보이이자 지역에서 소문난 거대 목장주에 최고 학벌과 음악의 조예까지 깊은 사람이지만, 어이없게도 한참 덜 자란 사내다. 밤에는 동생과 나란히 누워 자야 하고, 잔소리가 없어서인지 씻지도 않고, 오랫동안 숭배하는 자신만의 우상을 여태 잊지 못해 입만 열면 그 타령이다.

생각하면 아이러니하다. 그렇게 덜 성숙한 사내가 그딴식으로 심술을 부려가며 주변 사람을 숨도 못 쉬게 틀어쥐다니. 하지만 어찌보면 당연한 일 같기도 하다. 자신의 미성숙과 두려움을 감추기 위해 '언터처블'이란 갑옷을 둘러친 셈이니까. 


어린이 혹은 청년의 미성숙은 격려와 응원을 부르지만, 나이 든 이의 미성숙은 화를 부른다. 충분히 발효된 성숙함을 뿜어내야 할 나이에 아직도 풋내 나는 미성숙으로 부글대는 사람, 곤란하다. (물론 컴버비치의 연기는 한편으론 묘한 연민을 불러 일으킨다. 근데 그건 어디까지나 컴버비치 한정)


더욱 곤란한 건 바로 그런 '필'들이 은근 눈에 띈다는 거.

부족한 능력을 감추려고 버럭으로 눌러대는 시니어들, 자신이 이루지 못한 걸 아이에게 강요하는 부모들, 이미 낡고 철 지난 사고방식을 반성할 줄 모르는 이들. 다들 '필'의 변주가 아닐는지.

가장 결정적으로 곤란한 건 나 역시 '필'의 사돈의 팔촌 정도 아닐까 하는 두려움.

'필'의 엔딩을 생각하면 우리 다 같이 정신 차려야 하는데. 끄응~


사족: 필을 연기한 컴버비치에게 남우주연상을 안 주다니. 오스카는 뭐냐!


 




딸 (97년생)

/ 파워 오브 도그 씨네큐브 포스터 구합니다...


약점은 어떻게 생기는 걸까


필은 강인한 남성성과 카리스마로 사람들을 휘어잡는다.

그는 유약함과 동성애자라는 정체성을 숨기기 위해 포악한 마초를 만들었다.


필의 눈에 피터의 첫인상이 한심한 건 당연지사다. 미스 낸시라고 조롱당해도 어쩌지 못하니.

그러나 피터는 필과 다르다. 숨기지 않고 등을 꼿꼿이 핀다.

놀림받고 말에서 떨어지고 야유당해도 피하지 않는다.

대신 조용히 자기 길을 걸어 사람들을 압도한다.


초등학생 때 황토색과 초록색 체크무늬 면 반바지를 입고 학교에 간 적이 있다. 투박하지만 귀엽고 편한 바지였다. 급식을 받기 위해 줄을 섰을 때 남자애들의 키득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나를 보고 있었다.

누군가 "너 아빠 바지 입고 왔냐?" 소리쳤다.

얼굴이 벌게지는 게 느껴졌다. 모두 내 바지만 쳐다보는 기분이었다.

투박하고 귀엽던 바지가 촌스럽고 못생겨 보였다. 바지가 닿는 다리의 부분들이 까슬했다.

그 밑으로 울긋불긋 아토피가 난 다리도 생각났다.

남은 일과 동안 의자에 붙은 듯 앉아있었다. 다시는 학교에 입고 가지 않았다.


약점은 언제 어떻게 생긴 걸까

누군가 내 바지를 가리켰을 때? 웃음소리를 들었을 때? 바지를 안 입겠다고 다짐했을 때?

더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바지를 처음 봤을 때, 남자애 바지 같다 라는 걱정을 스치듯 했을 때

그리고 그걸 다른 사람에게 들켰을 때 지나갔던 걱정은 돌아와 약점이 된다.

별거 아닌 우려도 말 한마디 현실로 일어나면 약점이 된다.

사람들은 당신이 뭘 입고 뭘 하는지에 관심이 없다고 말로, 실험으로 아무리 설득해도 마음이 그렇게 쉽나.


약점을 가장 약점 같지 않게 만드는 방법은 뻔뻔해지기이다.

고개를 빳빳이 든다고 약점이 사라지는 건 아니다.

피터가 꼿꼿이 걸을 때 차이는 주변의 고요뿐이다. 

피터는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다. 마른 몸과 허연 피부는 그대로다.

대신 내 안의 사실을 바꿀 순 있다.

예를 들면 '투박하지만 귀여운 바지'를 '투박하고 아빠 바지 같지만 귀여운 바지'로.


무한자아긍정을 하자는 얘기가 아니라 어쩌라고의 마법을 쓰자는 얘기이다.

숨기려고만 하다간 유리멘탈 필과 같은 화를 당할지도 모르니깐!



유리멘탈과 기겁나쎔의 즐거운 한 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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