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전희주 May 19. 2022

504호의 밥상

다르게 생겨먹은 모녀의 세상 모든 일 각자 리뷰 : 쿠킹

엄마 (68년생)

/제일 좋아하는 음식 : 남이 해준 음식


‘자고로 요리는 이러저러해야 한다’라는 말을 들으면 누구는 백종원을 떠올릴 테고, 누구는 김수미를, 또 누구는 군침 분출 고문을 자행했던  <아메리칸 셰프>라는 영화를 생각하겠지만 나는 피카소를 떠올린다. 당신이 생각하는 그 사람 맞다. 화가 파블로 피카소.


피카소가 음식을 잘했는지 말았는지, 미식가인지 아닌지는 모른다.

내가 요리의 이상형을 피카소로 꼽는 이유는 예전에 피카소 전시회에서 봤던 몇 장의 사진 때문이다. 사진에는 생선을 곱게 발라 먹은 피카소가 생선뼈 모양을 그대로 진흙에 찍어 도자기로 만드는 과정이 담겨 있었다. 먹을 거 실컷 먹고 그걸로 예술 작품으로 만드는 하이엔드급의 1타 2피.


잠시  얘기를 하자면 <생활의 달인>이라는 프로그램이 있다. 요즘은 성격이 조금 바뀐 듯한데,  프로그램 초창기에는  그대로 생활 속에서 달인의 경지를 보여주는 사람들이 많이 나왔었다. 청바지 공장의 달인은  감고 미싱을 돌려도 청바지  벌을 드르륵 박아내고, 공연장에서 일하는 분은 혼자서 몇십 개의 의자를 한꺼번에 나르고, 초밥의 달인은   번의 손길로 항상 똑같은 개수의 밥알을 잡아낸다. 근데 나에겐 그런 식의 노련함이 전혀 없다.


집밥을  먹느라 애쓰긴 했어도   보면서 파를  써는  같은  상상도  하고, 오랫동안 방송원고를 쓰며 살았지만 여전히 독수리 타법이다. 그러니 노련하게 척척 해내는 사람을 보면 감탄이 절로 나곤 하는데, 피카소는 그걸 넘어섰다. 남들은 먹고 싸는 걸로 끝내는 프로세스를, 먹고 예술하고 싸는 걸로 바꿔 버리다니.  (영화 <기생충>에서 지하 생활자 톤으로) 피카소, 리스펙!


나는 언젠가 그런 날이 오길 꿈꾼다.

숟가락을 들고 바들바들 떨며 간을 맞추는 게 아니라  큰 간장통을 통째로 들고 대충 휘휘 휘둘러도 간이 딱 맞게 요리하는 날.

거기에 또 다른 욕심도 상상한다.


음악을 즐기면서  리듬을 살려 음식을 만들  있게 되길, 와인을 홀짝이며 요리해도 음식을 망치지 않게 되길, 영화에 나온 누구처럼 빨간 립스틱에 진주 목걸이를  채로 요리하렘의 순간이 많아지길. 예술은 못해도  정도도 안될까.

요리를 즐거움과 성취감으로 배운 게 아니라, 파김치가 돼서 들어와 또다시 허겁지겁 한 끼 차려 먹기 바쁜 생존 스킬로 배운 사람의 뒤늦은 소망이다.




딸 (97년생)

/내 계란후라이 걸레짝후라이


요리는 몇 안 되는 내가 할 줄 아는 창작 활동이다.

손 안에서 재료들이 형태를 잃어간다. 썰고 다지고 굽고 볶으면 각각 개별적으로 존재하던 것들이 하나의 음식이 되어간다. 뜨거운 프라이팬에서 접시에 예쁘게 옮긴 결과물을 눈으로, 코로, 혀로 맛보며 나의 성취를 느낀다.


직접 해 먹었다고 남이 해준 것보다 더 맛있는 건 아니다. 요리 초보인 내 요리의 '맛있음'은 다양한 곳에서 나온다. 여기에는 배달의 유혹을 뿌리친 나의 지조, 직접 챙겨 먹었다는 기특함, 냉장고 속 재료들을 해치웠다는 뿌듯함, 귀찮음을 이겨냈다는 보람 등이 복합적으로 섞여 있다. 즉 이때의 맛있음은 혀에서만 느끼는 것이 아니다.  

물론 최소한의 맛이 나오지 않는다면 저 만족감들 중 무엇 하나 느낄 수 없다. 맛은 요리가 성공했을 땐 '맛있음'의 요소 중 하나지만 요리가 망했을 땐 실패작인 이유의 전부가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맛없음을 감추기 위해 꼭꼭 씹어 삼켜야 하는 건 오롯이 나 혼자의 몫이다.


요리가 좋은 또 다른 이유는 어깨너머 지식과 상상력이 맞닿는 영역이라는 점이다. 기억 속에 남아있는 엄마가 해줬던 밥상, 외할아버지의 만찬, 할머니가 챙겨주셨던 반찬들 등이 내가 요리를 하는 과정에서 재구성된다. 집에서 보고 들었던 조리법과 유튜브에서 주워들은 레시피가 나의 상상력과 만나 새로운 한 그릇이 탄생한다. 전통과 상상력의 퓨전 요리인 것이다.


이렇게 쓰니 내가 음식을 그럴싸하게 하는 사람 같지만 아직 요리는 어렵다. 반숙은 완숙이 되고 감자는 서걱거리며 간이 안 맞아 소금을 뿌려 먹는 일이 일상이다.

그렇지만 요리는 손으로 하는 거엔 소질이 없던 나에게 새로운 창작의 기쁨을 알려주었다. 거기다 효녀 브랜딩도 가능케 해주었다. 어떻게든 한 끼 차려 놓으면 부모님은 맛있게 드신다. 가끔 엄마는 영혼 없는 리뷰라는 게 감춰지지 않지만.


언젠가는 잘하겠지 라는 마음으로 또다시 요리에 도전한다. 정해진 답은 없지만 아직 앞으로 살 날 중 하루 세끼면 기회는 무궁무진하게 남아있으니깐. 망하면 고쳐줄 엄마도 있으니깐!



매거진의 이전글 개인 위생에 주의하세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