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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희주 Jun 02. 2022

영화관이 영화다

다르게 생겨먹은 모녀의 세상 모든 일 각자 리뷰 : 영화관 cinema

엄마 (68년생)

/ 그렇게 영화를 보면서도 포인트 적립에 오랫동안 무심. 젠장.


아침 7시에서 9시에 방송되는 출근 시간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일한 적이 있다. 이른 새벽부터 일하는 게 고역이긴 했지만, 아이와 함께하는 낮시간을 확보할 수 있다는 장점 때문에 선택한 일이었다. 거기에 덤으로 얻은 기쁨은 혼자 영화를 볼 수 있다는 점. 

회의나 녹음이 없는 날엔  식사도 건너뛰고 영화관으로 달려갔다. 그때 본 영화가 <살인의 추억>이었고 <브로크백 마운틴>과 <파이란> <올드보이>였다. 그 영화들을 보려고 헐레벌떡 달려가 좌석에 앉을 때면, 입을 틀어막고 소리 없는 환호라도 지르고 싶어지곤 했다.  


요즘 OTT 서비스가 주목받지만 난 여전히 영화관을 사랑한다. 영화관이라는 물리적 공간을.  어떨 땐 영화관 의자의 까끌한 패브릭 촉감이 그리워질 때도 있고,  화면 비율을 맞추기 위해 스크린이 움직이며 내는 ‘위이잉’ 소리가 듣고 싶어질 때도 있다. 이토록 영화관에 사로잡힌 이유는 뭘까. 


만화 영화 <도라에몽>을 보면 ‘어디로든 문’이란 게 있다. 작은 문틀에 문짝만 붙어있는 이 희한한 물건은 가고 싶은 곳을 생각하고 문을 열면 바로 그곳으로 가게 해준다. <닥터 스트레인지>에서  ‘포털’ 도 같은 일을 한다. 영화관은 바로 ‘어디로든 문’ 혹은 ‘포털’이 아닐지. 

거기를 통하면 

가보고 싶었던 곳이나, 가봐야 할 곳, 혹은 갈 거라곤 상상도 못 하던 곳으로 갈 수 있다. 


물론 극장에 가지 않고도 영화를 볼 수 있다. 

하지만 마틴 스코세지 감독의 3시간 반짜리 영화 <아이리시맨>을 극장에 가지 않고 넷플릭스에서 처음 봤다면, 로버트 드니로와 조 페시가 빵에 와인을 적셔먹으면서 친밀함을 나누던 분위기를 이해할 수 있었을까. 영화 후반부에서  알 파치노를 차에 태우기 전에 자동차 안에 흐르던 긴장감과 짜증스러움이 뒤범벅된 공기를 감지할 수 있었을까. 

영화에서 로버트 드니로는 딸에게 ‘넌 내가 뭘 보고 어떤 일을 겪었는지 모른’다고 말하지만, 영화관은 그걸 가능하게 해 준다.


영화관의 어둠에 발을 들여놓는 순간, 일상은 떨어져 나가고, 가볼 수 없는 곳의 이야기 속으로 날 밀어 넣는다. 어린 시절부터 영화를 늘 좋아했지만, 영화관 자체에 열광하기 시작한 건 30대 후반부이었던 것도 그런 연유일 거다. 일과 결혼생활, 육아의 하중이 커질수록 그걸 잠시 잊고 숨어있기 좋은 방이 절실했으니까. 내가 더 이상 품기 어려운 꿈과 욕망이  확연해질수록 다른 방식으로라도 그걸 맛보고 싶었으니까.    


박찬욱 감독이 칸에서 감독상을 받고 난 후에 한 인터뷰에서 영화관이 곧 영화라고 한 말에 동의한다. 영화관에서 한 체험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것이란 말에도 크게 고개를 끄덕이며 집 근처 영화 상영시간표를 뒤적여본다. 


영화관은 조금씩 누수되어버린 내 삶의 일부분을 복기하게 해 준다. 

내게서 빠져나간 것이 남긴 빈자리의 목격자. 

시간 되면 그 목격자의 진술을 들으러 가고 싶다. 




딸 (97년생)

/ 언제나 굿즈에 진심


영화관에 대한 최초의 기억은 <밀리언 달러 베이비>이다. 힐러리 스웽크를 보내주는 클린트 이스트우드를 보며 기절할 듯 오열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지금 봐도 눈물을 훔치는 명장면이지만 들썩거리며 흐느끼기까지 했던 건 처음으로 경험해본 영화관의 마법 때문이었다.


극장의 마법은 말 그대로 마법 같다. 주변의 어떠한 방해도 없이 영화와 나 사이의 경계를 허물어 이야기와 정서에 잠기게 한다. 오늘의 날씨, 나의 옷차림, 요즘 고민거리 등 현실은 잊고 주인공의 삶이 내 생활이 된다. 빛 하나 들지 않는 실내, 거대한 스크린, 웅장한 사운드가 영화의 몰입감을 최고조로 이끌어낸다.


그래서 감독들은 자신들의 영화를 제발 극장에서 봐 달라고 호소하는 건가 보다. 드니 빌뇌브는 누군가는 <듄>을 아이패드로 볼 것이라고 하자 진심으로 괴로워했고 마틴 스콜세지는 <아이리시맨>을 제발 큰 화면으로, 가능한 극장에서 볼 것을 당부하며 209분을 4부작으로 끊어보는 팁이 트위터에서 돌자 그럴 생각조차 하지 말라고 했다.


영화관의 힘에는 화면과 소리에도 있지만 ‘멈출 수 없음’에도 있다. 수많은 OTT 서비스가 론칭되고 나 역시 넷플릭스와 디즈니 플러스를 이용 중인데 OTT를 이용할수록 영화를 보다 멈추는 일이 잦아졌다. 

나는 주인공에게 부끄럽거나 곤란한 상황이 발생하면 공감성 수치를 심하게 느낀다. 비단 창피를 당하는 상황뿐만 아니라 무언가 발각될 것만 같아도 몹시 괴로워한다. 영화관에서 볼 때도 느끼긴 하지만 빠르게 사건이 진행되고 해결 과정으로 넘어가면 고통은 휘발된다. 오히려 영화를 볼 때 상황을 멈출 수 있는 기회가 오자 지레 겁먹고 움츠러드는 일들이 발생한 것이다. 올드보이의 “상상력이 있어서 비겁해지는 것”이라는 대사처럼 말이다.


주인공에게 일어난 갈등은 영화를 진행시키는 원동력이다. 그런데 터질 거 같은 아슬아슬한 상황들을 회피하다 보니 영화가 본론에 들어가기도 전에 멈춰 버린다. 더 나쁜 점은 몇 번의 정지가 영화를 끊어보는 습관을 만든 것이다. 그로 인해 집에서 영화를 볼 땐 화면이나 음악도 즐기지 못하고 이야기의 힘도 느끼지 못해 영화를 1/10밖에 경험하지 못한다. 이 사실을 모두 알고 있음에도 여전히 스페이스의 유혹을 이겨내지 못하고 있는 게 나의 실정이다.


사람 바이 사람. 케이스 바이 케이스이지만 틱톡, 릴스, 쇼츠 등 짧고 단순한 콘텐츠가 익숙해져 가는 세대에게 깊이 있고 밀도 높은 집중력을 쉽게 발휘할 수 있게 유도해주는 건 영화관이 유일무이하지 않을까. 나날이 올라가는 티켓 값은 멀티플렉스 회사들의 횡포도 맞지만 거대한 스크린, 웅장한 사운드, 그리고 '멈출 수 없음' 이 더 희귀해져 가고 있음을 말하는 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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