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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그미 Aug 02. 2023

나의 자궁과 노동과 행정 이야기

첫 업무: 계정 만들기

내가 얼마나 울다 잠들었든지, 회사에서 나에 대해 얼마나 심각하게, 어떤 부담을 가지고 검토했는지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이, 시간은 무정하게 흘렀고, 다음날 나는 출근해야 했다.


출근하는 그날부터 나의 일상은 또 하나의 컨베이어벨트에 올라타게 되었다. 남편의 출근 시간(이 시기, 그는 7시쯤 학교로 출근했다)에 맞추어 함께 출근준비를 한다. 남편은 나를 시댁 앞에 데려다준다. 나는 시댁에서 어머님께서 준비한 아침을 먹고, 8시가 조금 지날 무렵 아버님의 출근 차를 타고 시청으로 간다. 임신한 내 배는 이미 7개월. 시부모님은 전날 울었던 나를 여러 가지 말로 위로해 주셨지만 사무실 사람들을 만나는 두려움은 여전히 컸다. 출근시간은 9시인데, 나는 왜 아버님과 이토록 일찍 출근하고 있는 걸까? 그것은 바로, 어머님께서 임신한 내가 아침은 챙겨 먹고 출근해야 한다고 생각하셨기 때문에, 이 몸으로 직장생활을 시작하면서 언덕을 오르내리는 만원 버스를 타는 것은 너무 위험하다고도 생각하셨기 때문에, 온 식구들의 배려를 받게 되었기 때문이지. 그래서 내 아침 출근을 위해 나 외에 세 사람이 공을 들이는 출근의 컨베이어벨트가 만들어지고 만 것이다.

너무 따뜻한 시댁의 배려 속에서 추워질 준비를 하며 사무실로 들어서는 기분은, 썼다.


그럼에도 사무실에서 나는 붙임성 있고 나잇값을 할 것 같은 새내기로 보이기 위해 빙긋빙긋 웃으며 인사를 드리고 다녔다. 텅 비어있는 사무실에서 어정쩡하게 내 자리가 어디일지 고민하며 서 있을 내 모습을 상상했는데, 8시 15분경의 사무실은 이미 직원들 몇 명의 대화소리로 채워지고 있었다. 사무실은 파티션으로 공간이 구분되어 있고, 나는 우리 부서 자리에 들어서서 그곳에 계신 사람들한테 인사했다. 그중에 한 분이 자리를 알려주셔서 가방을 내려놓을 수 있었다.

"기획과에서, 알고 있었어요?"

팀을 구분하는 파티션 너머로, 물으시는데, 나는 잠깐 고민했다. 기획과에서, 내 임신을 알았던가?

임용 당일 나는 동기들과 기획과 회의실에서 하루종일 부서 배치를 기다리고 있었다. 기획과는 기획조정실의 주무과이고, 주무과에서 신규들의 과 배치를 결정한 모양이다.

"제가 인사과에는, 말씀드리고 임용을 받았는데요, 기획과에서도 알았을지 잘 모르겠어요. 모르지 않았을까요..?"

근데 지금 생각해 보면, 알았을 것 같다.

함께 커피를 마시자고 하셔서, 가보니, 복도 쪽 팀 자리에 둥그런 다탁이 있고 여기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각자의 컵에 방금 추출한 커피를 조금씩 따르고 있었다. 나에게는 잎 차를 우려 주셨다.

"임신 중이라, 커피 마시면 안 되지?"

한 잔 정도는, 되는데요...

"ㅎㅎ.. 감사합니다."

"알고 우리 과에 보낸 것 같아. 우리 과에 오면 그런 일이 많이 생기더라고. 여기에 있던 누구는 결혼을 했어. 여기에 있던 다른 누구는 아내가 임신을 했지. 지금은 다른 곳으로 발령받아 갔고. 여기에 있던 누구는 육아휴직을 했고, 지금 누구누구도 아기가 어려서 육아시간을 쓰고 있어. 우리 과에 오면 그런 가정적인 경사가 많이 생기나 봐."

"그것도 좋은 일이지."

지금 이 대화를 돌이켜보니, 나를 맞아들이기 위해 많이 노력하셨던 것 같다. 그 당시에는 그저 모자장수와 토끼의 티타임에 갑자기 끼게 된 앨리스라도 된 듯한 기분으로 어정쩡하게 얼어붙어서 긴장을 풀지 못하고 있었는데 말이다. 그럼 이 때 임신한 새내기라 너무 뻔뻔하다는 생각은 내가 만든 벽이었을까? 무엇이었을까?


직원으로서 첫날, 나는 가운데 팀의 끄트머리에 앉아 있었다. 컴퓨터를 켜는데 부팅하자마자 암호를 입력해야 해서 당황했다. 서랍 어디를 뒤져보아도 암호를 적은 메모지가 없다. 옆사람에게 물어도 모르고, 팀장님에게 물어도 모르신다. 어쩌다가 겨우겨우 알아내어 부팅까지는 했는데, 이번에는 윈도우 로그인 암호를 입력해야 한다. 내 책상을 여러 사람이 뒤져댄 끝에 웬 다이어리에 붙어있는 메모지를 보고 암호를 찾았다. (방탈출인가?) 그제야  PC를 쓰나 싶었는데, 웬 암호를 또 입력하라고 해서 윈도우가 실행되자마자 다시 화면이 가로막혀 버렸다. 옆사람이 자신의 계정을 쓰라며 도와줘서 그 잠금을 풀 수 있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보안용 방화벽 프로그램이다.) 그렇게 어렵게 윈도우 바탕화면을 보고 나서, '시도행정'이라는 포털시스템 계정을 만들고, '공직자통합메일'이라는 메일에 계정을 만들었다. 말이 '만들었다'지, 만들고자 하는 아이디와, 비밀번호를 서무님께 제출하고, 또 다른 종이에는 기본급에 상조회비, 노조비, 천원미만 공제 기부 등 원천징수할 내역을 표시해 신청하고, 공동인증서를 바로 발급받지 못해서, 전산망을 하나도 바로 쓰지 못하고, 시간은 붕 뜬 채 지나가기만 했다. 나는 전날 사귄 기획조정실 동기들과 대화하는 카카오톡을 확인하며 시간을 죽였다.

가만히 앉아 멀뚱멀뚱 있는 모습이 보기에 좀 그러셨던지, 팀장님께서 스프링제본된 두꺼운 인쇄물을 한 권 주셨다. 부서 업무를 정리한 '바인더'였는데, 무슨 소리인지 이해가 안 가서 꾸벅꾸벅 졸며 조금씩 읽었다.


퇴근길은 남편이 와서 나를 태워주었다.

"오늘 어땠어?"

"내 오늘 가장 중요한 업무는 로그인이었어, 로그인. 업무를 하기 위해 암호가 몇 개나 필요한지 알아요? 부팅 암호, 윈도우 로그인 암호, 방화벽 암호, 그리고 드디어 내 계정으로 로그인하는 암호. 출근하기 위해서 네 개의 암호가 필요해."

"그 정도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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