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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움 Nov 24. 2021

안 사고 버티기

어머 폼이 안 나요!

새벽 6시 

한 차례 글을 쓰고 났더니 출출했다. 홍시 하나와 초콜릿 두어 조각을 먹었다. 냉동해둔 손바닥 안에 쏙 들어오는 작은 떡 세 조각을 꺼내 팬에 기름을 두르고 구웠다. 커피와 함께 먹으려고 긴 손잡이가 달린 작은 냄비를 찾았다. 물을 끓이기 위해서이다. 냄비에 어제저녁 끓여둔 버섯 매운탕이 있어서 그대로 덮어 두었다. 평소 같으면 국을 냉면그릇에 붓고 냄비를 씻어서 쓸 텐데 귀찮은 생각이 들었다. '뭐에 물을 끓일까' 하다가 압력솥이 보여서 거기에 커피물을 끓였다. 폼 안 나게 그게 뭐냐고 할 수도 있겠지만 나는 뭐 상관없다.

전자레인지나 커피포트가 있으면 그것을 사용할 텐데 우리 집에는 없다. 미니멀 라이프 하면서 다 비웠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불편 없이 수년을 잘 살고 있다. '어머 불편해 보이시는데요~' 할 수도 있겠지만 아니라고 고개를 젓는다. 물건이 많아서 치이는 것보다 덜 불편하다고!

오늘 아침은 압력솥에 끓인 물로 커피를 타서 마시고 있지만 커피맛은 여전히 좋다.




우리 집에는 냄비가 세 개 있었다. 하나는 찜솥 겸용 큰 냄비이고, 다음은 국 끓이는 데 전용으로 사용하는 작은 코팅 냄비, 마지막으로 커피나 라면을 끓이기에 적당한 긴 손잡이가 달린 가벼운 양은냄비이다. 그런데 몇 개월 전 국냄비를 비웠다. 코팅 제품이라서 흠집이 많아 건강을 위해 비운 것이다. 냄비 3개가 딱 우리 네 식구에게 적당한 개수라 생각했다.(큰 아이는 인천에서 살고 있음) 그래서 비운 것과 비슷한 크기의 국냄비를 사야지 했는데 며칠을 살아보니 별 불편이 없었다. 

끓이는 데 사용할 수 있는 그릇 종류로는 냄비 두 개와 압력솥이 전부이다. 이 세 개로 재주껏 돌려가며 쓰고 있다. 종종 오늘 아침 같은 일이 생기는데 큰 찜솥 냄비에 커피물을 끓인다거나 압력솥에 라면 한 개를 조리할 때도 있다. 그렇지만 그게 못 견디게 불편하거나 힘들지 않다. 


가족 수대로 접시나 공기, 국그릇을 구비해 두고 다 처분했는데, 어쩌다 접시나 공기가 금이 가거나 깨져서 비울 때가 있다. 재밌는 일은 한동안 안 사고 버텨보면 꼭 사람 수대로 그릇이 필요하지는 않다는 것을 알게 된다. 가족이 다 같이 동시에 밥을 먹을 때가 드물고, 혹시 함께 먹을 일이 생기면 다른 그릇으로 대체를 하면 그만이었다. 밥공기가 없으면 그때만 국그릇을 쓴다던가 하는 방법으로.

꼭 필요한 만큼 물건을 가지고 있지만 그중에서 몇 가지 덜어내도 생활이 그다지 불편해지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다. 요새는 쓰던 물건이 망가지거나 오래돼 비워도 곧바로 다시 사지 않는다. 얼마간 지내보는 것이다. 




전자레인지를 사야 하나? 하고 잠시 고민한 적이 있었다. 블로그에 요리 콘텐츠를 올리면서부터이다. 전자레인지로 폼나고 쉽게 요리할 수 있는 레시피를 보면서 나도 그래 볼까? 했었다. 하지만 전자레인지를 내손으로 처분하고서 다시 들이는 게 썩 내키지 않아 버텼다. 그릇도 몇 가지 없는 데다 접시류도 모두 일괄 흰색으로 통일한지라, 음식을 만들어 사진을 찍으려고 디피를 하니 영 사진이 볼 품이 없었다. 그렇다고 그릇을 왕창 들이고 싶지는 않고. 해서 나는 블로그 콘텐츠를 위한 그릇을 지인들에게 빌리기로 했다. 몇몇 지인에게 부탁하여 돌려가며 쓰기로. 전자레인지로 만드는 음식은 안 하면 되었다. 찜기나 팬 중심의 요리를 하면 되니까 하고 전자레인지도 패스했다. 국냄비 대신 사진 비주얼이 좋을 예쁜 냄비를 하나 사려고 했으나 어쩐 일인지 그마저 미루고 있었다.


그렇게 얼마쯤 지났는데 블로그 요리 콘텐츠 올리는 게 시들해졌다. 블로그 정리를 하면서 불필요한 콘텐츠를 비우기로 해서 말이다. 자연스럽게 다양한 그릇도 필요 없어졌고 전자레인지는 더더욱 살 일도 없어졌다. 국냄비도.

안 사고 버티다 보니 자연스럽게 해결이 되었다. 블로그 쓴다고 그것들을 새로 장만했으면 어쩔 뻔했나 싶다. 불필요해진 그릇들을 다시 비운다고 울상이 되어 '내가 왜 그랬나' 후회막심하지 않았을까! 기어이 안 사고 버틴 내가 매번 받아쓰기에 백점 맞아오는 아이처럼 기특하다.


뭐가 없어지거나 낡아서 비운 후 습관처럼 대용품을 사지 않아도 충분히 잘 살아갈 수 있었다. 진짜 안 사면 안 되는 물건도 있겠지만, 그런 거 아니라면 기다려보고 없는 대로 살아보는 일도 좋은듯하다. 절제력도 생기고 무엇보다 늘어난 물건으로 인해 스트레스를 받지 않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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