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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움 Nov 26. 2021

그림이 취미인가요?

그림으로 밥 먹고 살았지만

그림을 수십 년 그려오고 있어도 그림에 대해 조바심이 없는 사람, 대가가 되어야겠다, 잘 나가는 일러스트레이터가 되어야겠다 라는 꿈으로 열정을 붙태우지도 않는 사람, 그 사람이 바로 나다.

그림이란 나에게 친구 같은 거다. 워낙 오랜 시간 함께 해 와서 굳이 의식하지 않아도 그림자처럼 붙어있는 존재랄까? 


그림을 좋아하고 관심 있게 그리기 시작한 때는 6살 전후인 것 같다. 옆집 언니가 초등학교에서 받아온 학습지에 인쇄된 그림을 보여준 적이 있었다.

"도, 도, 도깨비 사과다!"라는 글씨가 있고 도깨비와 사과가 그려진 그림이었다. 두꺼운 검은 선으로 그려진 도깨비 그림, 온통 빨간 크레파스 칠이 된 그림이 아직도 생생히 떠오른다. 그 뒤부터 연필을 잡으면 무조건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여러 가지 물건의 모습을 보고 따라 그리거나 사물과 자연을 관찰하며 닥치는 대로 그려보곤 했다. 

교과 과목도 미술을 제일 잘했다. 그림을 잘 그리는 건 스스로 생각하기에 당연한 일이라, 굳이 드러내 자랑할 필요도 칭찬받으려 애쓸 이유도 없었다. 어찌 됐든 미술시간은 나의 자존감이 불쑥 올라가는 시간이었다. 선생님들은 내 그림을 교실 뒤 벽에 항상 붙여 주었고, 칭찬은 밥 먹듯 해주었으며, 친구들은 그림 좀 그려달라 쫓아다녔다. 어떤 선생님은 내가 만든 작품을 전 교실로 들고 다니며 자랑을 하기도 했다.




이후 나는 20대가 되어 그림을 그리는 직업을 갖고 살게 되었다. 미술을 전공한 건 한참 후의 일이다. 만화가의 문하생으로 화실 생활을 했고, 프리랜서로 일을 했으며, 오랜 시간 그림을 지겹도록 꾸역꾸역 많이 그렸다. 나의 손을 거쳐 나온 책들은 이미 사라진 것도 있고 아직도 시중에 돌아다니기도 한다. 그러나 정작 나의 이름으로 일러스트집을 내거나 만화책을 내본 적이 없다. 2020년 공저로 쓴 동화집 '하루살이의 내일과 메뚜기의 내년'이 한 권 있을 뿐이다. 시와 일러스트를 담은 시화집을 이제야 겨우 준비 중이다.


그림은 항상 내 곁에서 살고 있어서일까? 내 이름을 걸고 그림에 관한 책을 내는 일이나 전시를 하는 일에 열정적이지 않다. 아는 작가들 중 어떤 이들은 전시 기회만 있으면 어떻게든 전시회를 갖고 이름을 알리기 위해 애를 쓴다. 하나 나는 그림을 단번에 승부해야 하는 어떤 성공의 도구로 생각지 않는다. 평생을 가며 함께 즐기고 좋아하며 어루만지는 무형의 벗이라 생각한다. 어차피 앞으로도 수십 년 그릴 텐데 무어그리 급하게 뛰어다닌단 말인가! 그래서인지 가장 오래 붙들고 살아온 그림에 관련한 책보다는 글로 된 책을 먼저 내기도 했다. 



그림을 생각하면 여유롭다. 그림과 돈을 교환하며 살던 시절에는 느껴보지 못했던 기분이다. 이제는 돈을 벌기 위해 남의 그림을 그리는 일을 거의 하지 않는다. 몸도 마음도 그림에 대해 편안해졌다. 아주 가끔 마음이 내키면 의뢰가 오는 그림을 그릴 수는 있지만, 내 작품 위주로 그리며 살아가려 한다. 그림을 지겹게도, 치열하게도 그리고 살아봤기에 앞으로는 이 녀석을 사랑스럽고 다정한 눈길로 어루만지며 함께 가려한다. 정말 그러고 싶다...


한때는 그림 그리는 게 노동처럼 힘들어서 영영 그림과 이별을 선언한 적도 있었다. 

학교 다닐 때 취미와 특기를 물으면 생각할 겨를도 없이 '그림 그리기'라 했었다. 하나 그림을 그려서 밥 먹고 사는 일이 쩐내나도록 힘들다 보니 내가 착각하고 살았다 생각했다. 특기는 맞는데 취미는 아니라고, 고개를 세차게 흔들며 부정했다. 

지금, 시간도 마음도 여유로워지고 보니 특기도 맞고 취미도 맞다는 걸 확인한다. 그림과 이별을 선언하고 몇 해 못가 다시 그림을 그렸다. 역시나 나는 그림을 그리고 살아야 하는 사람인가 보다. 오래가고 멀리 가려면 너무 치열하게 가지 말자. 삶의 배경으로 깔아 두어도 그림은 평생 나와 떨어질 수 없는 '제2의 나'이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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