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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쇼 Jul 28. 2024

집착과 센스

#가산디지털단지 #구로디지털단지 #애니메이션 #게임 #개발자

스물 중반즈음 보광동에서 자취를 할 때다. 1층에 주인이 살았는데 치매를 앓는 개가 있었다. 1년동안 아무리 간식과 밥, 고기를 챙겨줘도 처음 보는 것처럼 사납게 짖어댔다. 얼마 지나면 정신을 차렸는지 꼬리를 흔들며 반겼다. 내가 쓰던 방은 한강이 찔끔 보였다. 나머지 방은 선배 둘이 사용했다. 그러다 보니 평일, 주말 가릴 것 없이 손님이 들끓었다. 


젊은 청춘들이 돈이 어디 있겠는가 갑자기 들이닥치는게 특기여서 집에 있는 식재료로 밥을 차려줬다. 어느날인가 내가 예뻐하는 후배 커플이 왔다. 집에 있는게 고구마와 양파, 호박이어서 고구마 된장찌개를 끓였다. 달작지근하고 뭉클한 고구마와 된장의 조합은 상극이었다. 왜 그랬을까.


이제 오십이 넘어 머리카락이 성글어지고 피부도 칙칙해준 후배는 그때 먹었던 된장찌개를 재료 삼아 놀리곤 한다. 이상한 음식은 결혼을 해서도 지속됐다. 실험 정신이 발동돼 요것조것 섞다보면 잡식이 됐다. 부엌은 남편 손으로 넘어갔다.


며칠전 선배가 전화가 왔다. 


"윤정아! 준하가 쉬는 날이라고 밥 해준대! 제육볶음이랑 부추전이야"


그는 올해 스물여덟이다. 애니메이션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게임 세계로 뛰어들었다. 2D 애니메이션으로 1인용 PC 게임을 만들고 있다. 구로디지탈 단지에서 스타트업 회사를 차리고 밤낮으로 컴퓨터 앞에 앉아 있다. 오십 초반인 나는 구로와 가산디지털 단지 컴순이 1세대일 것이다. 남편은 운동하지 않고 밤새 앉아 사이트를 개발했고 나는 디자인과 퍼블리셔를 했다. 그덕에 신부전 환자가 된 신랑은 병원 신세다. 


선배 아들이 컴퓨터 앞에 앉아 있는 모습을 보면 남편처럼 고혈압과 신부전증을 앓을까 걱정이 됐다. '저러다 배에 관 꽂는데...' 잔소리가 입술에 걸터 앉았다. 그런 말이 귀에 들어갈리 없는 이십대를 통과하고 있다. 그런데 밥을 해주겠다니 이게 무슨 소리지?


잘 익은 수박 한통과 한우물로 키운 유나네 농장 계란 한 판을 들고 갔다. 내가 청년 시절 주말마다 찾아간 선배네 집은 행당동에 있었다. 주말이면 집 앞 슈퍼에서 계란 10개를 사들고 가서 밥 값인냥 내놓았다. 그 버릇이 지금도 남았다.


선배네 초인종을 누르니 집 안 가득 제육볶음 냄새와 기름 냄새로 여름을 더욱 달구고 있었다. 가스렌지 앞에는 팬티 차림에 앞치마를 하고 있는 '스모선수'가 있었다. 그림을 그리는 물리적인 시간은 엉덩이와 의자가 일체가 됐고 100kg에서 130kg까지 육중하고 육덕진 체형을 건설하고 있었다. 


어렸을때 너무 잘 생겨서 '장군감'이라는 말을 든 꽃미남은 눈은 작아지고 볼 살은 차오른 로키산맥 어디쯤의 흑곰 같았다. 30도가 넘는 여름 장마에 무슨 밥을 해주겠다고 감격스러웠다.


가슴과 배, 중요 부위만 가린 선배의 앞치마는 미니 사이즈가 돼 탱크탑 같았다. 뒤집개를 왼손에 들고 씨익 웃으며


"이모! 어렸을 때 음식 해줬던 것 갚아야죠"



나는 해준 것도 없고 여름이면 해수욕장과 바닷가를 가고 정신없이 논 것 밖에 없었다. 그는 어떤 장면을 기억하고 있을까? 안면도 해수욕장에서 모래를 뿌리며 동생과 싸우며 혼난 것? 지하철에 퍼질러 앉아 딱지치다가 우리 애들 아니라는 표정으로 승객들 눈치 살폈던 것? 호수공원에서 자전거 타고 돗자리 펴고 앉아 실컷 먹고 놀았던 것?


평일 낮, 나이 든 선풍기가 회전 기능을 잃어 툴툴 거리는 소리가 났다. 꿔다 놓은 보리자루 마냥 에어컨이 한기를 뿜어줬다. 식탁에는 제육볶음과 부추전, 샐러드와 김치를 곁들인 상이 차려졌다. 밥을 먹으며 회사 얘기를 들었다. 실력있는 개발자를 만나 올해안에 게임이 출시될 정도로 일이 속도감 있게 진행되고 있다. 주 4회 근무로 바꾸고도 계획대로 가고 있다니 '집착과 센스'로 무장된 사내 분위기를 만든 팀원들 얘기에 빠져 들었다. 


"이래뵈도 이모랑 삼촌이 구로랑 가산에 1세대였어~"


뭐라도 숟가락을 얹고 싶어 옛날 얘기를 했다. 일이 신나서 밤을 새우고 체력이 바닥나는 줄 모르고 운동을 멀리했다. 


어느새 커서 해주는 밥을 다 얻어 먹다니. 과거의 시간이 현재를 빛내는 순간을 경험한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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