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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국에 가면 순해진다

#직장 #회사 #알바 #안국동 #참관수업

by 가쇼

그녀는 연노랑 산수유를 닮은 블라우스에 뒷트임이 있는 멜방 청치마를 입었다. 살찐 복숭아 빛이 감도는 뺨은 검은 생머리 안에서 찬란했다. 나는 일하다 말고 그녀를 지켜봤다. 수출용 컨테이너 박스처럼 생긴 기다란 복도에 노란색 바구니를 배꼽 위치에 들고 교실에 들어갈 준비하고 있었다.


이날은 특수학교 학부모 참관 수업이 있는 날이었다. 여느 일반 학교와 다를바 없었다. 선생님들, 아이들 모두 긴장하고 있었다. 그녀의 심장이 세차게 두근대 보였지만 침착함을 유지했다. 특별한 관심이 필요한 아이들 수준에 맞게 수업을 준비하고 진행하는게 쉽지 않을 것이다. 얼마나 많이 시뮬레이션을 돌렸을까. 어느 선생님은 전날 구토 증상까지 있었다고 토로했다.


교생 실습처럼 생각하라는 동료 교사들 응원에 힘입어 그녀는 교실 안으로 씩씩하게 들어갔다. 나는 컴퓨터 모니터를 바라보면서도 그녀가 잘하고 있는지, 아이들이 예상밖의 행동을 해서 당황하지 않을지 염려가 됐다. 뒷통수는 교실에서 흘러 나오는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나까지 긴장돼 의자를 박차고 일어났다. 뒷문이 반쯤 열려 있는 교실을 멀리서 엿봤다. 아이들과 공익근무요원들, 실무사 선생님들의 도움으로 미술 수업이 진행됐다. 4월 햇살이 교실 안으로 들어왔다. 그녀는 가늘게 떨리는 음성으로 수업을 이어갔다.


종이 울리고 수업이 끝났다. 활짝 웃으며 나오는 그녀의 홀가분한 마음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수업의 소감을 밝히며 큰 짐을 내려 놓은 어깨는 긴장이 빠져 나갔다. 이런 날은 누군가와 밥을 먹든, 술한잔을 하든 풀어야 할텐데 누가 있을까.


다음주면 시간 강사 계약이 끝난다고 했다. 밥이라도 사주고 싶었다. 그러나 근무한지 며칠 안됐고 워낙 나이차이도 많은데다 젊은 사람들이 어려워 제안을 못했다. 퇴근 시간이 가까워 집에 갈 차비를 하고 일어섰다.


"그냥 가시게요? 이런날 맥주라도 한 잔 하셔야 할텐데..."


내가 아쉬워 한마디 건냈다. 부담과 긴장이 높았던 이런 날은 누구라도 그녀와 함께 속 마음을 털어놓고 홀가분한 시간을 누리길 바랬다. 그래야 하는 것 아닌가 했다. 그러나 요즘은 부서별로 사무실이 나뉘어져 있어 또래든, 동료들과 교감하기엔 한계가 있어 보였다.


그녀는 조용히 복도를 빠져 나갔다. 뒷트임이 있는 청치마는 발걸음에 따라 일정하게 움직였다. 긴 생머리를 늘어뜨린 뒷모습이 쨘했다. 내가 회사를 다닐때는 동료가 결혼하면 집들이도 갔다. 일이 끝아면 함께 밥을 먹고 쇼핑을 하고 종로를 누볐다. 연애 상담, 상사 뒷담화까지 모든 것을 함께 했다. 사모하던 직장 동료가 있으면 속마음을 털어 놓으며 얼굴이 뜨거워지던 낭만이 있었다. 도시락을 싸들고 인왕산을 올랐고 동대문, 남대문에 가서 가짜 명품 화장품도 사고 비가 오는 날엔 경복궁에 처마에 앉아 수다를 떨었다. 모든 것을 털어 놓으며 내 일처럼 속상해 주던 친구같은 동료들이 있어 혼자 지낼 틈이 없었다.


나에게 안국동은 봄바람처럼 설레고 온순한 추억으로 가득한 곳이었다. 지금은 그때보다 몇 배나 사람들이 많아졌다. 주문은 키오스크로 대체됐고 끈끈한 연결은 조심성으로 변했다. 젊은 시절의 배경이 됐던 그때의 분위기가 특별한 게 없었다. 그때의 직장 생활이 떠올라 그녀가 혼자 뒤돌아 가는 모습이 눈에 밟혔다. 얼마나 눈부시고 찬란한 젊음이던가. 잘못한 것도 없는데 그저 열심히 공부하고 밥 벌이를 하고 있을뿐인데 말이다.


꾸미지 않아도 아름다운 젊은 시절 작은 것 하나라도 나누며 웃기를 바랄뿐이다. 그게 그렇게 어려운 일이 될 줄은 몰랐다. 내가 해 줄게 없었다. 힘 있는 사람도 아니고 사회를 움직일 동력도 없지만 미천한 마음이 전해졌는지 고맙다며 냉장고에서 차가운 허쉬초코렛을 '이거 드세요'하며 건냈다. 당신이라는 꽃이 얼마나 아름답게 빛나는지 그 찰나의 순간을 누군가와 함께 단 한 명이라도 곁에 있기를 바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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