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철에서 만난 여인
며칠전 출근길 지하철에서 쓰러진 여성을 부축해 내려서 119에 신고를 하고 병원에 꼭 가보라며 오지랖을 떨었었다. 덕분에 지각을 했다. 그녀는 몸을 잘 추스렸을까? 병원은 갔을까? 어쩌다 그렇게 몸 관리를 하지 않고 쓰러졌는지 혹시나 했는데 전화번호를 받아놔서 '괜찮은지' 문자를 보냈다. 내 연락을 기다렸다니 안심이 됐다.
조계사 근처 '안녕 인사동'이라는 쇼핑몰 센터에서 만나기로 했다. 쌈지 쇼핑몰 같은 곳이었는데 인사동이 낯설게 느껴지는 인공적인 건물은 1,2층이 프랜차이즈 음식점과 커피숍이 입점해 있었다. 식은땀을 흘리고 햇볕한번 받아본 적 없는 애기 같은 하얀 손등은 무게가 느껴지지 않았었다. 젊은 사람이 몸 관리를 그렇게 안했는지 먹고 사느라 그랬을까? 혼자 지내다 보니 잘 먹지 못해서 그랬을까.
혼자 생각의 블록을 쌓고 있을때 단가라 줄무늬 원피스에 청자켓을 입고 씩씩하게 걸어오는 그녀가 내 이름을 조심스럽게 부르며 다가와 인사를 건냈다. 그때 봤던 그 여인이 맞나? 싶을 정도로 씩씩하게 묶은 머리와 눈동자가 감춰질 정도로 웃는 모습이 건강해 보였다.
"네 그때 정말 감사했습니다. 일단 식사부터 하러 가실까요?"
그녀는 미리 생각해둔 식당으로 나를 끌고 갔다. 누군가 '혼자 산다'고 하면 목이 메인다. 혼자는 사는게 아니라 버티는 것 아닌가. 고종 황제가 집권하던 조선말에 태어나신 증조할머니, 증조할아버지와 외할머니, 외할아버지를 중심으로 사촌부터 오촌, 육촌까지 먼 친인척들 발길이 끊이지 않던 어린시절을 거쳐 1인 가구가 당연한 인생 중년은 여전히 어색하고 서툴다.
그녀와 간단하게 초밥으로 식사를 하고 근처 카페로 자리를 옮겼다. 그녀는 수학 과외를 하고 있었고 놀랍게도 나이가 40대 말, 내년이면 오십을 바라보는 나이였다. 나는 손을 입에 가져다 대며 놀란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녀는 자신을 젊게 봐 줘서 고맙다며 연신 웃었다. 합이 잘 맞는 여동생이 있어서 같이 여행도 가고 함께 할 일도 도모하며 잘 지내고 있었다. 서른 초반에 결혼을 했지만 이혼을 했고 지금은 혼자가 편하다고 했다. 그녀의 사주가 궁금했지만 내가 방전 상태였다. 1시간 반을 넘게 두 사람 상담을 하고 와서 눈꺼풀이 내려오고 있었다.
그녀가 생각한 동선과 일정에 따라 움직이며 만남을 끝내고 집으로 가는 시간까지 확실했다. 뭐든 맺고 끊기가 서툴고 느린 나는 도움을 주고 대접을 받으며 마무리가 된 것 같았다. 인연이 닿으면 다시 만나겠지만 우애 깊은 자매와 그녀를 사랑하는 어머니가 있다는 것, 나이에 비해 과하게 젊어 보이는 맑음이 좋았다.
그때 지하철에서 따라 내린 사람이 '남자였어야' 나나 그대나 역사가 이뤄졌을텐데 둘 다 불행한 것 아니냐며 웃었다. 스스로 삶을 마감한 오빠의 명복을 빌어 달라고 한 스님을 찾아갔었다. 그분은 우리가 살다가는 시간은 아주 긴 시간속에서 '번개가 내리치는 순간'이라고 했다. 떠나 보낸 사람에 대해 아파하면 내가 다친다고 했다. 그렇게 나를 위로해준 스님도 다음해 갑자기 심장마비로 돌아가셨다. 오십 중반밖에 안돼서 왕성하게 활동하실 나이셨는데 얕은 관계든 깊은 인연이든 헤어짐이 늘어나고 있다. 내 나이가 그런 것인가.
오지랖의 결말이 싱겁게 끝났지만 나를 돌보고 나에게 괜찮다고 말해주는 시간을 늘리고 나에게 집중하고 싶다. 남 생각하다가 내 신호가 약해지는 것을 느낀다. 나부터 맑게, 나에게 밝게, 나에게 끝내준다고 결심하게 된 그런 일이 있었다. 그녀에게 공감도 얻지 못한 그 얘기를 들려주며 아쉬운 작별을 했다.
삼십년, 사십년 된 인연들이 있다. 번개처럼 짧은 만남도 삼사십년만큼 깊은 관계가 아니고서야 그때 그 지하철에서 만났던게 아닐까. 스쳐지나가는 수많은 사람들이 그냥 타인이 아닌 나의 일부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