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호국제양궁장 #전국체전 #양궁 #김제덕 #신주소 #예천손칼국 #청복
집주소가 동네 이름에서 도로명 주소로 바뀌면서 마을 중심에서 길바닥 중심으로 바뀐 느낌이다. 일부러 신주소를 쓰지 않고 구주소를 고수했는데 민원을 넣거나 인터넷으로 행정처리 할 때 신주소를 기입해야 해서 뜻대로 되지 않았다. 마을 이름에 소망을 품고 사는 사람들의 바람이 사라지는 기분이다. 아는 출판사 사장이 쓰던 "사람이 땅에 발 딛고 살아야 한다" 는 말이 떠올랐다. 신영복 선생님의 "머리에서 발끝론"도 그런게 아닌가 싶다.
'여행에서 가장 먼 길은 지구 한 바퀴를 도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람의 머리에서 가슴까지,가슴에서 발까지 여행하는 것이다'
예천에서 19세이하 남녀 양궁대회가 열리는 '진호국제양궁장'에 참관을 하러 갔다. 주소를 찾아보니 '경상북도 예천군 예천읍 양궁장길 38'이다. 원래 마을 이름은 '청복리(淸福里)'다. 세상에 하늘이 내린 복은 2가지가 있는데 '열복(熱福)'과 '청복(淸福)'이다. '열복'은 권세가를 부르는 소위 권력을 차지한 사람들이 누리는 복을 말하며 '청복'은 산중에 살면서 시를 읊고 노래를 부르며 좋은 약초를 길러가며 세월이 오가는 것도 모르고 아침저녁으로 난리가 난 것도 듣지 못하는 것이다. '청복'은 하늘이 사람들에게 매우 아끼고 주지 않아 얻은 이가 드물고 '열복'을 얻은 이가 많다고 했다. 선조들은 하늘이 성공한 사람에게 모든 복을 주지 않고 두가지 복을 바라는 사람에게 조롱을 하기까지 했다. 예천군 '청복리' 대신 '열복리'라고 했을수도 있는데 '청복리'라고 한 것은 마을 사람들이 추구하는 정신이 담긴 이름이지 않을까 싶다. 그런데 '양궁길 38'이라니.
아무튼 무궁화 열차를 타고 예천역에 내려 근처 식당을 찾으니 '기사식당' 간판이 보여 찾아갔는데 문이 닫혀 옆에 있던 '예천손칼국수' 집으로 방향을 돌렸다. 손님 없는 한적한 식당에 문턱을 넘으니 양궁 고장답게 88올림픽 금메달리스트 김수녕선수의 사진과 양궁 모형의 액자, 그 옆에 소주잔이 놓여 있는 김제덕 선수 액자가 벽에 기대어 있었다. 식당 사장님이 김제덕 선수 찐 팬이신가보다 했는데 액자 앞에 놓인 소주잔을 궁금해 하며 그 옆에 벽에 걸려 있는 액자를 보니 식당 주인이 김제덕 선수 큰어머니시구나 했다.
초등학생쯤 되어 보이는 김제덕 선수와 중년 여성 두분이 귀에 꽃을 꽂고 셀카를 찍은 사진 밑에 '큰엄마 정말 감사합니다 제덕 올림'이 울림이 돼서 한참 들여다 봤다
주방에서 당당하게 앞치마를 두르시고 딱딱한 눈빛에 얇은 미소를 띤 식당 사장님이 내어주신 반찬은 8천원짜리가 맞나? 주문을 잘못 들으신게 아닐까 싶어 재차 확인했다. 소처럼 배추잎, 상추잎을 입 안 가득 넘기며 빈 속을 채우고 김제덕 선수 큰어머니임을 알아차려드리게 인사를 하고 잘먹었다고 했다. 내가 돌본 조카가 세계를 제패했으니 동네방네 자랑스러움을 입으로 말하지 않고 반찬으로 담아내신 것 같았다.
김제덕 선수의 고향이 청복리인지는 모르겠으나 청복리 진호국제양궁장에 도착하니 건물에 가디건을 두른것처럼 김제덕 선수의 금메달을 축하하는 플랭카드가 크게 걸려 있었다. 도로에는 김제덕 선수의 금메달을 자랑스러워하는 문구들로 띠를 두르며 축하의 기쁨을 나누고 있었다.
1박2일 양궁장 일정을 끝내고 예천 고속버스터미널을 가기 위해 카카오T를 불렀다. 택시안에서 양궁 얘기로 기사분께 뭐 아시는게 있는지 운을 띄웠는데 어쩌다 카카오T 때문에 힘든 얘기로 빠졌다. 네네 맞짱구를 치다가 '예천손칼국수' 식당 앞에 내려달라고 하고 다시 들렀다. 이번에는 칼국수를 시켰는데 보쌈과 새로 한 밥, 쌈까지 나와서 '칼국수'에 나오는게 맞는지 얼떨떨한 표정으로 다시 확인했다. 비바람이 부는 양궁장에서 반팔을 입고 젖은 운동화 때문에 오돌오돌 떨던 살들이 뜨거운 국물을 애원했다.
일은 끝냈지, 배 속 가득 뜨겁게 속을 채워 홀가분한 마음으로 터미널로 향하는데 나를 유심히 바라보는 시선이 왼쪽 아래에서 느껴졌다. 허름한 집 앞 기둥에 털 달린 네 발 인생이 묶여 있었다. 허연 마스크를 뒤집어 쓴 두 발 인생을 보며 처음 보는 사이인데 젖은 시멘트 바닥 옆으로 누워 자기 배를 내밀었다.
"어머 너 이름이 뭐니" 하면서 쓰다듬었더니 기둥에 묶인 3보 안팎을 누빈 차갑고 단단한 근육이 만져지는 앞 발로 내 팔목을 잡아당겼다. 개가 의리를 지키면서 사람에게 이로운 일을 하면 “개가 사람보다 낫다”는 말을 한다. 두 발로 땅을 딛고 사는 사람보다 네 발로 땅을 딛고 살아가니 어찌 더 낫지 않겠나 발 딛고 살라는 말이 스친다. 지금까지 생존한 네 발과 두 발 인생끼리 서로를 보듬으며 차 시간 때문에 아쉬움을 남기고 헤어졌다.
서초동 고속버스터미널에 도착해 집으로 오는 지하철 안에서 반가운 지인 전화를 받았다. 코로나 시기로 요즘 어떻게 지내냐 서로의 안부를 묻다가 아시아나에서 일했던 지인의 남편이 아시아나 승무원 한 분이 생활고로 자살했다는 얘기를 들려줬다는 것이다. 코로나로 2년동안 일을 못하고 50만원으로 생활하다가 벼랑끝에 내몰려 스스로 생을 마감했으니 잘 모르는 사이지만 짧은 한숨이 나왔다. 복 중의 복 '청복'을 네 발이든 두 발이든 하늘의 뜻이 땅에 이뤄지는 그곳에서 아낌없이 받으시고 영면하시길 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