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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쇼 Sep 09. 2022

옥상 금덕이 #4

웜업만 8시간째 #추석 #명절음식 #차례상

내일은 추석이다. 신랑이 이황 선생 후손의 차례상을 얘기하며 이제부터 홍동백서를 빼겠단다. 그게 다 '일제 잔재'라고 했단다. 뭐 툭하면 '일제잔재'다. 정말 나쁜 잔재는 따로 있는데 돌아가신 조상 생각하며 식구들 먹을 것 하면 되고 이왕 차리는 것 사방팔방 복을 기원하며 순서에 맞게 차리면 되는 것을 어느 가문의 상차림이나 성균관 방식을 따라갈 필요가 뭐가 있겠냐. 하던대로 쪼대로 하면 되지.


그런데 명절 음식 거사를 앞두고 8시간째 웜업중이다. 아침 6시에 일어나 아는 언니 만나 동네 뒷산 산책을 하며 거점별 쉬는 공간에서 주저 앉아 차 마시며 이런일, 저런일 조잘거렸다. 마약같은 남 얘기로 기를 순환시키고 어제 있었던 일, 그저께 있었던 일 풀어낸다. 어느새 3시간을 훌쩍 넘겨 10시 반에 장을 보러 갔다. 벌써 재료가 소진된 게 있다. 부지런한 줌마님들한테 진 기분이다. 집에 와서 장본 것을 펼쳐 놓고 보니 몇가지가 빠졌다. 한두번 일도 아니고 일단 배가 너무 고파 평양 만두를 먹으러 나갔다.


서교동 남북통일 평양만두는 문을 닫았다. 전국에서 넘버1 맛집인데 두번째 손 꼽는 집은 구산동 평양손만두 2호점이다. 자유로를 달려 도착하니 왁자지껄 빈틈 없이 손님이 차서 번호표를 받았다. 어렸을때 겨울이면 매일 밀가루 반죽을 해서 칼국수 아니면 만두를 해먹었다. 그때 외할머니의 밀가루 사랑에 질려 쳐다도 안봤는데 시집와서 만두를 좋아하시는 시아버지덕에 먹기 싫어도 몇 번 먹는게 자리를 잡아 1년에 몇번 가는 집이 서교동 남북통일 만두집이다. 아버님이 폐암으로 투병하실 때 한 그릇을 비우셨던 집이다. 톡톡 입안에 터지는 돼지 기름과 잡채알갱이, 고추가루로 버무려 간이 똑 알맞다. 두번째 손꼽는 구산동 평양 손만두집은 재료를 얼마나 찰지게 수분을 뺐는지 퍽퍽하면서도 입안 가득 침 샘을 퍼올린다.


점심을 먹고 나니 커피 한잔이 생각나 행주산성 맥아더 카페를 갔다. 누군가 이곳에서 데이트를 즐긴다는 얘기를 듣고 가보니 자전거족들이 단체로  시끌벅적이다. 3시가  돼서 일어나 빨래 돌린게 생각났고 5단지 우리 한돈 고기집에 주문한 국거리와 불고기를 가지러 갔다. 차를 돌려서 가는데 신랑이 길을 잘못 들어섰다. 북조선 방향으로 기름값을 뿌리며 달려 갔다. 나이들어 하나둘 틀리고 실수하고 착각하고 빼먹어 똑똑한 그도 늙어간다.


몇시간 동안 차례상에 어떤 음식을 할지 결정하다가 번복했다. 결국 육전, 불고기, 나물, 갈비탕, 과일로 결론을 내렸는데 오전에 빠진 장보기를 하러 식자재마트로 가서는 피망도 사고 호박도 사면서 동그랑땡, 호박전, 잡채를 더했다. 두번째 장보기를 끝내고 빨래를 널러 옥상 금덕이에게 갔다.   돌리고 의자에 앉아 있다가 '쓰기의 감각' 어느새 읽고 있다. 해가 지고 있다.


집 청소하고 음식할 수 있게 싱크대, 냉장고 정리하고 버려야 할 게 있는데 부팅만 하다가 끝나겠다.  내 식구 먹을 차례 음식을 20년째 하면서 그 많은 시간 준비하고 치우는게 귀찮고 의미없지 않다. 차례상 올리고 나면 스스로 대견함과 뿌듯함이 몰려온다. 책 읽거나 유튜브 보거나 영화보며 느긋하게 보내는 것도 좋지만 내 몸에 들어가는 음식을 둥글게 빚고 지지고 볶고 끓이며 완성해 나가면 책임을 다한 것 같다. 그래도 매번 '차례상'을 안하고 싶다가도 어느새 장을 보고 웜업하며 시간 끌다가 음악 들으며 불 앞에 배꼽을 맞추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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