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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쇼 Sep 15. 2022

옥상 금덕이#10 치유를 포기하고 묽어지기

#치유 #힐링 #묽어지기 #오빠 #죽음 #존엄사 #맨발걷기 #옥상

나는 날씨의 노예다. 맑은 날은 기분이 좋고 흐린 날은 울적하다. 아무리 주체적으로 바꿔 보려고 해도 잘 안된다. 오늘의 마음 일기예보는 맑음이다. 아침에 눈을 뜨면 제일 먼저 창문밖 날씨를 살핀다. 아들이 8살때 쓴배낭에 페트병 하나를 넣고 산책에 나섰다. 아이가 어설프게 유성매직으로 쓴 자기 이름 석자가 배낭 주머니에 문양처럼 있다.


오늘도 맨발로 지표면과 뽀뽀를 하며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려는 행위를 포기하고 묽어지는 방법을 떠올려 봤다. 상처가 잉크처럼 진한 농도의 보이지 않는 물질이라면 진짜 물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개울가에 졸졸졸 명랑한 소리를 내며 흐르는 곳에 발을 담구고 미네랄이 풍부한 약수터 물을 마시고 습기가 가득찬 우거진 숲에서 심호흡을 해보고 바닷가 앞에서 음이온을 맡으며 두 팔을 벌려 보고 굴곡 없는 호수가를 응시해 보고 막힘이 없는 평지나 개벌을 거닐어 보는 것이다.


물건을 사서 돈을 쓰거나 맛있는 것을 먹어서 배를 채우거나 예쁜 옷을 사서 입는 것은 쉽고 간편한 감정 치환으로 희석에 큰 도움이 되는 것 같지 않다. 귀찮지만 해맑게 웃는 아이들과 시간을 보내고 따듯한 마음과 미소를 지닌 사람과 만나 교감을 나누고 개와 고양이 식물들과 눈을 맞추며 서로의 기운을 나누고 시간을 내서 그림을 그리거나 뜨개질처럼 창조적인 일을 하는 것이 희석에 큰 도움이 되는 것 같다.


잉크에 물을 타서 묽어지게 하다는 방법을 찾다가 잉크를 없애는 가장 좋은 방법은 글쓰기 아닌가 싶다. 펜에 잔뜩 담아서 무엇이든 끄적끄적 거리며 매일 감사와 고통의 일기를 쓰며 다른 형태로 만들면 잉크는 상처가 아닌 훌륭한 소재가 아닌가 싶다. 아이를 낳고 남편이 교통사고로 죽어 생이별한 어느 발레리나 이야기, 그녀가 말이 많았던 이유는 쏟아내야 할 사연이 너무 많아서 였다. 그녀가 들려준 웰다잉한 아버지는 많은 사람들과 나누고 싶은 욕심이 들어 '글을 한번 써보세요' 했다. 농담삼아 책을 내면 100만가고 넷플렉스 드라마로 나오지 않을까요 했다.


나와 다른 종류의 상처를 안고 있는 그녀와 내가 모르는 어떤 이들이 돈을 크게 들이지 않고 자신의 힘으로 시간을 만들고 엮어 따듯한 삶을 살았으면 좋겠다. 빨래에 얼룩이 진 것들은 강한 햇빛을 받으면 날라간다. 식물은 물이 아니라 통풍이 되지 않으면 죽는다. 강아지도 맨발로 땅을 딛지 않으면 스트레스를 받아 자주 짖는다. 큰 내상을 입어 절을 가거나 기도를 하거나 명상을 하거나 힐링을 하려고 온갖 방법을 찾는다. 친구의 친구가 알려준 잉크에 물타기로 희석하는 방법을 찾았다. 귀찮지만 남편 밥을 차려줬다. 나처럼 맨발걷던 낯선 사람과 일상의 소소한 얘기를 나눴다. 돈 들이지 않고 시간을 내서 하는 자연과 만남이 가장 좋은 중화제이다.

치유를 포기하니 자유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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