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기와 스킬, 연습이 동시에 필요한 일
신입 때는 정말 일이 많았다. 지금이야 일주일에 40시간 일을 하지만, 그때는 8시 반에 출근해 11시 반에 퇴근하고 주말에 하루 정도 더 나오는 것이 일상이었다. 내가 해야 하는 일은 정해져 있고, 나는 신입이라 하나도 모르는데 수많은 일들이 매일매일 1톤 트럭으로 와서 내 머리에 우수수 쏟아져 버리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머리는 아프고 정신은 없는데 눈을 질끈 감았더니 무엇이 떨어진 지 보이지도 않았던 상태와 같았다.
큰 것은 크게, 작게 작게 쳐내야 하는 일들이 메일과 전화로 쏟아졌다. 신입이다 보니 같이 일하는 모든 유관부서분들은 다 선배이기도 하니까 독촉 전화를 받으며 쩔쩔매다 보면 이미 6시가 지났다. 유관부서가 퇴근해서 전화가 조용해지면 그때 저녁을 먹고 와서 못 읽은 메일을 읽고 내 일을 하는 패턴이 반복되었다.
하루 종일 이렇게 치이다가 저녁을 대충 때우고 들어오다 보면 정작 내가 진짜 중요하게 해야 하는 신제품 개발이나 마케팅 전략, 매출 관리 등은 집중을 할 수가 없었다. 시간이 없으니 회사 근처에서 대충 때우는 저녁. 그나마 그 저녁의 반은 회사 사무실에서 굴러다니는 햇반과 레트로트 파우치를 돌려 컴퓨터 앞에서 대충 때우면서 먹기도 했다. 어쩌다 나가서 먹는 것도 싸구려 김밥 혹은 후루룩 짜장면 정도였다. 저녁에 먹는 당과 조미료가 혈당을 치솟게 만들다가 바로 떨어트려서 하품을 하게 만들었다. 어려운 유관부서의 전화를 계속 받느라 긴장되었던 마음은 떨어지는 혈당만큼 쳐지곤 했다.
앉아 있을 힘도 없어서 의자를 최대한 뒤로 빼고 앉은 것인지 책상에 누워있는 것인지 알 수 없지만 척추에는 당연히 무리가 갈 자세를 하면서 일을 한들, 단순 업무도 아니고, 머리를 써야 하는 전략 업무가 될 리 만무했다.
하나 둘 퇴근하는 선배들이 내 책상을 지나가고 있었다.
"그러다 허리 다친다. 잘 앉아서 일해." "졸리면 집에 가고 내일 해" "중요한 일 먼저 해야지." "계획을 세워"
저 세상 신선들이 싱글몰트 또로록 따르는 소리인 듯 들리지도 않았다.
당신들은 무려 "대리"잖아. 일을 잘하는 사람들이 나에게 그런 말을 하다니.
"계획을 세울 시간이 없어요. 흑"
어느 날 사수는 나에게 전화선을 뽑으라 했다. 오늘 너에게 아무것도 시키지 않고 말도 걸지 않을 테니 계획이란 것을 세워보라고. 시간은 충분히 주겠다고. 유관부서 분들이 뭐라 하지 않을까요? 내 자리까지 와서 왜 전화 안 받냐 왜 메일 안보냐고 닦달하지 않을까요? 신입의 마음은 오징어처럼 쪼그라들고 있었다.
쪼그라질 대로 된 마음이어서 그랬을까. 생각이란 것을 해 본 적 없던 오전 시간이어서 그랬던 것일까 왜이리 멍한거지?
회사에 들어와 처음으로 맞이하는 "자율적인 시간" 앞에서 나는 그제야 깨달았다.
나는 계획을 어떻게 세우고 어떻게 실행하는지 모른다.
최대한 계획적으로, 중요한 일을 먼저, 미룰 수 있는 것은 나중에, 안 해도 되는 일은 하지 말고 라는 일하는 법칙을 몰랐던 것이다. 그래서 A라는 사람이 전화가 오면 그 일을 하다, B라는 사람이 메일로 다른 일을 요청하면 그 일을 하면서 중구난방이 되었던 것이다.
내가 지금 해야 하는 일을 리스트업을 한 후 그것을 시간과 인과관계 순으로 정리했다. 엑셀과 마인드맵을 동시에 이용해서 역순으로 시간을 정하기도 했다.
처음이라 아마 한 5시간은 걸린 듯했다. 전화가 안되니 어떤 것은 내 윗 사수에게 간 것도 있겠지만 전반적으로 평화롭더라. 세상에! 다들 지금 해결해주지 않으면 당장 회사가 망할 것 거처럼 닦달하다니 내가 전화를 받지 않았다고 해서 이 회사 망하지 않았어! 이 세상 무너지지 않았어!! 유레카! 였다. 나중에 왜 전화가 안되었냐라는 투정을 받기도 했지만, 이미 세상은 무너지지 않는다는 것을 안 이후였다.
그 이후 지금 아무리 일이 많아도
1. 중요한 일을 최대한 세부적으로 to do list와 마치고 싶은 일정, 꼭 마쳐야만 하는 일정으로 스케줄링하여 1장으로 만들어 프린트 해 책상에 붙인다. 최근에는 어플도 많지만, 그런 것들은 내가 의지를 가지고 클릭을 해야만 내 눈앞에 보인다. 종이로 출력해 붙여 놓아야 무의식적으로 시선이 스칠 때에도 보일 수 있어야 한다.
2. 보통 꼭 마쳐야만 하는 일정에서 80% 앞당겨 끝내는 것을 목표로 삼고 계획을 세워야 한다. 무조건 다른 일들이 치고 들어온다. 세상은 내가 계획한 대로 움직이지 않는다. 절대. 단 한 번도 그 계획대로 된 적이 없다. 그러니 일정은 최소한 20% 넉넉하게, 시간, 비용도 다 버퍼를 주고 만든다. 어쩌다 시간이 남으면 일찍 퇴근하면 된다. 내 생각대로 계획을 짜다 보면 그 계획은 변경되고 늘어지기 마련이다. 100%이다. 이게 다 유관부서 때문이야. 팀장 때문이야. 에이전시 때문이야 라며 짜증 내는 것은 하수의 짓이다. 내가 생각하지 못하는 다양한 변수들이 세상에 존재하고 난 그것을 예측할 힘이 없다. 모든 스케줄링은 최대한 그들이 들어올 버퍼를 만들고 움직여야 한다.
3. 지금 일에서 중요한 것을 먼저 한다. 급한 일을 뜯어보면 그렇게 중요하지 않는 일도 있다. 그런 일이 펑크 나도 크게 내 일이 흔들리지는 않는다. 그러나 중요한 일은 다르다. 그것을 잘해야 인정받고 무시당하지 않는다. 다만 중요하지는 않지만 5분 안에 할 수 있는 일은 지금 한다. 5분이 넘어갈 것 같은 일은 일단 포스트잇에 적어 놓고 이후에 처리한다.
3. 중요하진 않지만 빨리 끝내야 하는 -포스트잇에 적어놓은 일들- 루틴 하게 처리할 수 있도록 시간을 정한다. 사람은 배고파야 빨리 마친다. 오전 11시-12시 사이, 오후 4시 반에서 5시 사이에 몰아넣고 써 놓은 포스트잇을 보며 처리하고 처리가 마치면 찢어 버린다. 큰 의미도 없고 지루한 이 일을 지금 내가 해야 해? 하는 마음을 포스트 잇을 하나하나 찢어가면서 달래 보도록 한다.
남에게 중요한 일을 신속하게 해 주느라 정작 내가 중요한 일을 놓친다면, 내가 일을 해줬던 그 누구도 내 편을 들지 않는다.
당연한 건데 회사 다닐 때 이런 것을 모른다면, 하나하나 참 억울하고 서운하니까. 그때는 어떤 것이 중요한 지 몰라서 모든 일이 다 중요한 것처럼 느꼈는데, 정작 내가 해야하는 일은 따로 있었다는 것이 충격과 배신으로 다가오기도 했다.
일 할 때 감정을 섞지 말자. 남의 감정에 섞이지도 말자. 감정 말고 스킬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