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더의 '성과'라는 성벽 아래 마모된 이름들
밤 11시, 마지막 팀원이 사라진 사무실은 숨죽인 듯 고요합니다.
꺼진 모니터 화면 속, 어쩌다 스치듯 비친 얼굴을 오래도록 바라본 적이 있나요?
낮 동안 '확신에 찬 리더'의 가면을 쓰고 있던 그 낯선 남자가,
빛바랜 형광등 아래서 참으로 비겁해 보일 때가 있습니다.
제가 팀원들에게 가장 자주 했던 말은 이것입니다.
"이게 다 성장의 과정이야."
업무가 산더미처럼 쌓여
초점 흐려진 눈으로 저를 바라보는 김 대리에게,
저는 그럴듯한 말을 건넸습니다.
아니, 변명을 건넸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지금 이 고비를 넘겨야 네 몸값이 올라가는 거야."
그때 저는 진심이라고 믿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보니
그건 그 친구의 커리어를 위한 조언이라기보다,
당장 내 성과를 위한 '예쁜 포장지'였을지도 모릅니다.
내가 리더로서 조율했어야 할 업무의 우선순위와
책임을 '성장'이라는 이름으로 슬쩍 떠넘기고 있었던 거죠.
어쩌면 저는 "너를 위해서"라는 말로
그들의 물리적인 시간과 정신력을
기꺼이 착취하고 있었던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잠시 말을 잇지 못했습니다.
예전에 저와 정말 호흡이 잘 맞던 주니어 친구가 하나 있었습니다.
제가 아이디어만 툭 던져도 찰떡같이 알아듣고,
다음 날이면 밤을 새워서라도 완벽한 결과물을 가져오던 친구였죠.
저는 그 친구가 기특했습니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제가 부려먹기 너무 편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탕비실에서 마주친 그 친구가
무심코 던진 한마디가 제 가슴을 깊숙이 후벼팠습니다.
"팀장님,
저, 요즘은 제가 연마되는 게 아니라,
매일 조금씩 깎여 나가서 사라지는 기분이 들어요."
그 말을 듣는 순간,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습니다.
나는 이 친구를 정성껏 갈고 닦아서 보석으로 만들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숫돌에 대고 사정없이 갈아내고 있었구나.
보석이 되기도 전에
가루가 되어 흩어지게 만들고 있었구나 싶어서요.
그 미안함을 뒤로하고 회의실에 들어가면,
저는 또 다시 '다 알고 있다'는 표정을 짓습니다.
팀원들이 정답을 갈구하며 저를 바라볼 때,
사실 속으로는 '나도 잘 모르겠는데, 어쩌지'라는 불안이
파도처럼 밀려오지만 입 밖으로 나오는 건
"걱정 마세요, 제게 다 계획이 있습니다"라는
매끄러운 거짓말뿐입니다.
리더는 답을 몰라도,
답을 아는 표정을 지어야 하는 사람입니다.
팀원들에게 리더의 불안은 빠르게 번집니다.
제가 조금만 흔들려도
조직 전체가 휘청이는 걸 목격한 적이 있거든요.
그래서 저는 점점 더 단단한 가면을 썼습니다.
하지만 그 가면이 두꺼워질수록,
정작 내 마음을 나눌 통로는 좁아지는 역설적인 고립감을 느낍니다.
수많은 사람 속에 둘러싸여 있으면서도,
"나도 무섭다"는 말을 할 수 없어 생기는
이 기묘한 외로움을 여러분도 아시나요?
리더라는 자리는 알면 알수록 참 어렵고 무겁습니다.
어디까지가 잠재력을 끌어올리는 건강한 자극이고,
어디서부터가 영혼을 갉아먹는 파괴적인 소모인지
그 경계가 너무나 모호하니까요.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기준은 세울 수 있을 것 같아요.
퇴근하는 팀원의 뒷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는 겁니다.
문을 나서며 성취감에 눈이 반짝이는지,
아니면 영혼이 다 빠져나간 듯 흐릿하고 무거운 발걸음을 옮기는지 말이죠.
내일은 출근하자마자 업무 리스트를 체크하기 전에,
그들의 표정부터 가만히 들여다보려고 합니다.
"그 일 다 됐니?"라는 말보다
"어제 잠은 좀 잤니?
오늘 표정이 좀 지쳐 보여서 걱정되네"라는 말이 먼저 나올 수 있도록 말이죠.
말처럼 쉽지는 않겠지만,
그리고 또다시 성과의 압박에 흔들리겠지만...
적어도 내가 사람을 '소모'하고 있지는 않은지
끊임없이 스스로에게 되물으려 합니다.
완벽한 리더보다는,
함께 길을 헤매줄 줄 아는 '인간적인 동료'가 되는 것.
그게 제가 리더로서 지켜야 할 마지막 선이니까요.
- BizMann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