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리 가지 않아도 충분했다
휴가가 승인됐다.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휴대폰을 확인했다. 습관이었다. 메일함을 열었다.
팀장의 답장이 와 있었다. "승인합니다. 푹 쉬고 오세요." 단 한 줄.
그런데 그 한 줄을 보는데 가슴이 먹먹했다. 정말 가도 되는구나. 정말 떠나도 되는구나.
짐을 챙겼다. 많이 가져가지 않았다.
배낭 하나. 옷 몇 벌, 세면도구, 충전기. 노트와 펜. 그게 전부였다. 카메라는 두고 갔다.
사진 찍으러 가는 게 아니니까. 나를 찾으러 가는 거니까.
강릉행 기차표를 예매했다. 오전 10시. 창가 자리. 기차를 타본 게 얼마 만인지 기억도 안 났다.
늘 급했다. 빠른 게 최고였다. KTX, 비행기, 고속버스. 빨리 가는 것. 빨리 도착하는 것.
그게 중요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천천히 가고 싶었다.
서울역에 도착했다. 사람들로 가득했다. 출근하는 사람, 출장 가는 사람, 여행 가는 사람.
모두 바빴다. 나도 그들 중 하나였다. 아니, 그랬었다. 이제는 조금 다른 것 같았다.
뭐가 다른지 말하기는 어렵지만.
기차에 올랐다. 짐을 선반에 올리고 자리에 앉았다. 창가. 서울의 풍경이 보였다.
빌딩들. 아파트들. 사람들. 익숙한 풍경. 10년을 본 풍경. 그런데 오늘은 달라 보였다.
이별하는 것처럼. 잠시지만.
기차가 출발했다. 천천히. 서울이 멀어졌다. 도시가 작아졌다. 빌딩이 사라졌다.
들판이 나타났다. 하늘이 넓어졌다. 숨통이 트이는 것 같았다.
두 시간쯤 지났을까. 강릉역에 도착했다. 기차에서 내려 숨을 들이마셨다. 공기가 달랐다.
서울의 공기와 다른 느낌. 상상일까? 아니면 진짜 다른 걸까? 모르겠다. 그냥 다르게 느껴졌다.
택시를 탔다. "안목해변이요." 기사님이 물었다. "여행 오셨어요?"
"네." "좋아요. 날씨도 좋고. 커피 맛있는 데 많아요." "감사합니다."
짧은 대화이지만 그 대화가 편안했다.
서울에서는 택시를 타도 말을 안 했다. 말하기 싫었다. 피곤했다.
그런데 여기서는 달랐다. 안목해변에 도착했다. 기사님 말대로 사람이 많았다.
카페 거리는 붐볐다. 관광객들. 커플들. 가족들. 다들 커피를 들고 해변을 걸었다.
'여기도 사람이 많네.' 처음 든 생각이었다. 실망스러웠다. 고요를 기대했는데.
한 카페에 들어갔다.
"아메리카노 하나요."
"여기서 드시나요?"
"아니요, 테이크아웃이요."
커피를 받아 들고 해변으로 향했다. 멀리서 파도 소리가 들렸다. 크고 웅장한 소리.
그 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모래밭에 섰다. 사람들 사이를 지나 물가로 걸었다.
신발을 벗었다. 발이 모래에 닿았다. 차갑고 거칠었다. 감각이 깨어났다.
발바닥으로 느껴지는 모래의 질감. 발가락 사이로 스며드는 모래알. 이상하게 선명했다.
한 걸음씩 물가로 다가갔다. 파도가 밀려왔다. 하얀 거품. 발을 적셨다. 순간 숨이 멎었다.
너무 차가웠다. 12월의 바다. 겨울의 물. 얼음장 같았다. 급히 뒤로 물러났다.
그런데 다시 다가갔다. 파도가 또 왔다. 이번에는 준비했다.
차가웠지만 견딜 만했다. 발목까지 물이 찼다. 차가움이 온몸으로 퍼졌다.
그런데 이상했다. 아프지 않았다. 오히려 살아있는 느낌. 감각이 있다는 느낌.
파도를 봤다. 끊임없이 왔다. 규칙적이지 않았다. 크게 왔다가 작게 왔다가.
빠르게 왔다가 천천히 왔다가. 예측할 수 없었다. 통제할 수 없었다. 그냥 왔다. 자기 방식대로.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식어 있었다. 그래도 마셨다. 쓰고 떫었다. 그런데 괜찮았다.
파도를 보며 서 있었다. 시간이 흘렀다. 얼마나 지났는지 몰랐다.
그때 옆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실례지만, 괜찮으세요?"
돌아봤다. 중년의 여자분이었다. 걱정스러운 얼굴로 나를 봤다. 나는 당황했다.
"네? 아, 네. 괜찮은데요."
"아까부터 계속 거기 서 계셔서요. 혹시 무슨 일이라도..."
그제야 깨달았다. 내가 얼마나 오래 서 있었는지. 사람들이 어떻게 봤을지.
파도에 발 담그고 멍하니 서 있는 사람. 이상해 보였을 것이다.
"아, 죄송해요. 그냥... 파도를 보고 있었어요."
여자분이 미소 지었다. "그러셨구나. 놀래서 그래요. 요즘 바다에서 안 좋은 일들이 많아서."
그분도 아마 알고 있었을 것이다. 겨울 바다의 의미를. 혼자 서 있는 사람의 의미를.
"괜찮아요. 정말 괜찮습니다. 감사합니다."
여자분이 고개를 끄덕이고 걸어갔다. 나는 그 뒷모습을 봤다.
모르는 사람을 걱정해 주는 사람. 그냥 지나칠 수도 있었는데 멈춰 선 사람. 고마웠다.
그 순간 깨달았다. 나는 걱정스러워 보였던 것이다. 위험해 보였던 것이다.
내가 그렇게 보일 정도였나? 서울에서 내 모습이 그랬나? 무너지기 직전처럼 보였나?
파도를 다시 봤다. 이번에는 다르게 보였다. 파도는 그냥 파도였다.
의미를 부여하는 건 나였다. 슬프다고 느끼는 것도, 위로받는다고 느끼는 것도, 전부 나였다.
파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냥 왔다 갔다 할 뿐.
그런데 그게 좋았다. 말이 없는 게. 묻지 않는 게. 요구하지 않는 게.
서울에서는 모든 게 말을 했다. "빨리 해", "더 잘해", "뒤처지지 마". 회사가, 사람들이,
심지어 나 자신이. 끊임없이 말했다. 요구했다. 압박했다.
그런데 파도는 달랐다.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았다. 나한테 빨리 어디 가라고 하지 않았다.
뭔가 되라고 하지 않았다. 증명하라고 하지 않았다. 그냥 왔다. 갔다. 왔다. 갔다. 그뿐이었다.
머릿속이 조용해졌다. 서울에서는 늘 시끄러웠다. 생각, 걱정, 계획, 후회. 쉬지 않고 돌아갔다.
자려고 누워도 생각이 멈추지 않았다.
'내일 뭐 하지', '저 말 왜 그렇게 했지', '이러다 큰일 나는 거 아니야'.
끊임없는 내면의 소음. 그런데 지금은 조용했다. 생각이 멈췄다.
아니, 생각이 필요 없었다. 지금 이 순간, 발에 닿는 물의 차가움, 귀에 들리는 파도 소리,
코로 들이마시는 바다 냄새.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생각할 필요가 없었다.
분석할 필요가 없었다. 의미를 찾을 필요가 없었다. 그냥 있었다. 존재했다.
파도 앞에 서 있는 한 사람으로.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해가 기울고 있었다. 주변 사람들이 하나둘 떠났다. 나도 물가에서 나왔다.
발을 닦지 않았다. 그대로 모래밭에 앉았다. 젖은 발에 모래가 붙었다. 불편했지만 개의치 않았다.
커피는 완전히 식었다. 마지막 한 모금을 마셨다. 차갑고 쓰고 떫었다.
완벽하지 않았다. 그런데 괜찮았다. 완벽할 필요가 없었다.
따뜻하지 않아도, 맛있지 않아도, 괜찮았다. 지금 이 순간이 있으면 됐다.
가방에서 노트를 꺼냈다. 펜을 들었다. 뭔가 쓰고 싶었다.
거창한 깨달음이나 철학적인 문장이 아니라. 그냥 지금 느끼는 것.
"말이 필요 없는 순간이 있다. 증명하지 않아도 되는 시간이 있다.
파도는 묻지 않는다. 나도 답하지 않아도 된다. 그냥 여기 있으면 된다."
쓰고 나니 마음이 가벼웠다. 과장되지도 멋지지도 않았다.
그런데 진실함이 드러났다. 지금 내 마음 그대로였다.
해변을 떠나며 뒤를 돌아봤다. 파도는 여전히 왔다 갔다 했다.
내가 있든 없든 상관없이. 세상은 그렇게 돌아갔다. 나 하나 없어도,
나 하나 있어도. 세상은 계속됐다.
그게 슬프지 않았다. 오히려 편안했다. 내가 없어도 세상은 괜찮을 것이다.
그렇다면 나도 조금 쉬어도 괜찮지 않을까?
조금 느려도, 조금 부족해도, 괜찮지 않을까?
숙소로 걸어가며 나는 생각했다. 서울에서 잃어버린 게 뭔지 알 것 같았다.
고요. 침묵. 말이 필요 없는 상태. 그냥 존재하는 것만으로 충분한 순간.
강릉의 바다가 그걸 허락했다.
그리고 그 허락이, 내가 나 자신에게 줄 수 있는 첫 번째 선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