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롤리 세 번째 이야기
안내 책자를 펼쳐보니 시대와 미술 기법으로 전시 구역을 나눈 게 한눈에 보였다. 맨 먼저 17세기 작품을 감상하고 시대별로 맞춰서 나아가기로 했다. 인상 깊은 미술 작품만 찍기로 했는데 보는 작품마다 사진을 연신 찍어대서 도무지 진도가 나아가지 않았다. 시간이 촉박하면 더욱 그렇지만 시간에 쫓기지 않는 경우라도 마음이 초조하다. 게다가 같이 간 일행이 있다면 눈치가 보일 수밖에 없다. 친구가 데리고 간 경우라 친구의 감상 진도와 차이가 많이 나면 안 되는 상황. 그래도 친구와 이런저런 감상평을 나누면서 시간을 벌 수 있게 되었다.
사진을 찍은 걸 보니 유화로 만든 작품을 많이 찍은 게 드러났다. 수채화가 마치 동화 속의 장면을 한 폭의 그림으로 표현한 거라면 유화는 인상 깊은 장면을 뚝 떼어내 장엄하고 묵직하게 표현한 것 같다. 그래서 그런지 유화 작품을 보면 특유의 안정감이 있다. 초상화의 경우는 나오는 등장인물이 몸은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어떤 손짓을 하는지, 눈빛은 누구한테 가고 있는지 자연스레 관찰하게 된다. 여기에 빛의 강약 조절로 누가 스포트라이트를 받게 될지 힌트를 준다. 풍경화는 유화 특유의 색채감이 더해져 오렌지빛을 내는 노을로, 햇빛을 반사하는 호수로 나타낸다. 어떨 때는 인스타그램에 종종 나오는 필터링을 거친 사진보다 현실적인 느낌도 든다. 한쪽은 최대한 이쁘게 포장하려고 집중하는 거라면, 다른 쪽은 현실 세계에 관찰력과 상상력이 들어가서 그런 걸까? 초상화는 초상화대로, 풍경화는 풍경화대로 가볍게 지나치기 어렵다.
다음 전시관인 18세기와 19세기로 넘어가는데 심상치 않은 그림이 보였다. 검은색으로 도배를 한 듯한 그림. 시선이 쏠릴 수밖에 없었다. 좀 더 가까이서 보니 역대 미국 대통령 뒤로 철조망이 드러났다. 묵직함과 장엄함을 넘어 어둠과 절망감이 보였다. 솔직히 말해서 처음 볼 때는 군인인 줄 알았다. 자세히 봐야 조지 워싱턴을 비롯해 초기 미국 대통령이 나열된 것임을 알 수 있었다. 그만큼 분간을 하기 힘들게 했는데 왜 그렇게 표현했는가 궁금해서 생각을 해 보니 나름의 결론이 나왔다. 미국에서의 노예제는 건국 때부터 굳건히 자리를 지켰고 역대 대통령들은 노예제 폐지에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다. 대통령 본인이 노예가 있는데 폐지를 하고 싶었을까? 폐지는커녕 폐지를 할지 생각조차 안 했을 것이다. 노예를 가지는 게 당연했으니까. 이 화가는 초기 대통령을 동일한 검은 색상과 비슷한 체형, 무표정인 얼굴로 설정함으로써 역대 대통령을 한꺼번에 비판하는 묘수를 부렸다. 이 그림을 감상하면서 답답한 느낌과 함께 사회적 관습이 얼마나 끔찍할 수 있는지 다시 한번 상기했다. 청록색 줄이 답답한 마음에서 숨통을 조금이나마 틔워졌다.
다음 그림을 보는 순간 벌써 자유로운 느낌이 들었다. 다른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한 노예가 자신의 손목을 묶은 쇠사슬을 과감히 끊어내며 환호를 하고 있다. 몸과 마음 둘 다 억압에서 자유로워진다. 노예제라는 외부 억압에서의 해방과 함께 그로 인한 내면의 심리적 억압에서의 해방. 얼마나 자유로운 느낌이 들지 상상하기 힘들 정도다. 군에서 전역하는 순간 온갖 자유를 만끽한 듯한 기쁨으로 날아갈 것만 같은데 노예제에서 벗어나는 것은 얼마나 큰 자유를 얻는 것인지. 위의 그림이 구속으로부터 자유로운 순간을 멋지게 표현한 작품이라면 아래 그림은 자유로움이 어떤 느낌인지 단적으로 보여준다. 흰 드레스를 입은 여자가 바다 위에서 날아다니는데 마치 바다에 갇혀있다가 수면 위로 떠오르는 모습을 연상한다. 발걸음이 가벼워지는 것을 넘어 민들레 씨앗처럼 어디로든 날아갈 수 있는 느낌. 몸이 솜사탕으로 되면서 가벼워지는 느낌. 마음이 뛰면서 동시에 편안해지는 느낌. 모두 다 자유가 만드는 기적이다.
자유를 예술로 승화하는 전시를 감상하면서 하나의 그림이 천 마디의 말과 버금갈 정도로 표현할 수 있다는 게 많다고 생각했다. 자유롭게 미술관 여행을 즐기며 다음 장소로 여정을 이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