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흐보다 당신
아를은 기대했던 곳보다는 매우 작은 도시였다. 도착한 날이 일요일이기도 했고 해가 누그러지고 있는 오후 시간이었다는 것도 한몫 했지만 ‘고흐’를 기대한 내 마음이 너무나 컸던 모양이다. 늦은 점심식사와 길을 묻기 위해 가까이 보이는 샌드위치 가게에 들어갔다. 유럽에서 보기 어려운 ‘아메리카노’라는 메뉴를 보고 아메리카노 커피와 샌드위치를 먹을 수 있겠구나하는 기대를 했지만 우습게도 미국식 샌드위치를 가리키는 명칭이었다. 어째서 아메리카노인지 알 수 없는 그냥 그런 샌드위치와 에스프레소를 먹고 주인아주머니의 친절한 설명대로 골목길에 들어섰다.
그 골목길 끝에는 고흐의 작품에 나오는 ‘밤의 카페’가 있었다. 노란 벽면과 노천카페 차양이 실제 그림 그대로였지만 쓸쓸한 겨울날의 카페 풍경은 그림과는 너무나 달랐다. 해가 지고 어둠이 내리면 그림 속 풍경이 나타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카페 주변 골목을 서성이며 시간을 보냈다. 오렌지 빛 가로등이 하나둘 켜지고, 하늘엔 달과 별이 떠올랐다. 하지만 사람이 없는 카페의 풍경은 황량하기만 했다.
고흐가 그린 밤의 카페를 활기차게 만든 것은 카페에 모여 앉은 그림 속 사람들이었구나 하는 생각이이 불현듯 들었다.
아쉬움을 달래며 카페를 뒤로 한 채 론강을 찾았다. 계단을 통해 강둑으로 올라서자 차가운 강바람이 온 얼굴에 훅 끼쳐 들어왔다. 재킷에 달린 모자를 뒤집어쓰고 바람이 덜 부는 벤치와 돌기둥 사이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찬찬히 눈을 돌려 멀리 산 너머를 보았다. 아직 완전히 사라지지 않은 붉은 태양의 기운과 별처럼 떠오른 론강의 가로등, 은하수처럼 흐르는 바람을 살폈다. 기대한 밤의 카페는 아쉬움이 컸지만 바람과 별이 가득한 론강은 추운 겨울밤 외로운 여행자에게 잠시나마 행복과 평온함을 선물했다. 론강의 풍경을 그린 고흐의 작품 <별이 빛나는 밤>을 떠올려 보려고 애썼지만 바람 탓인지 머릿속이 하얬다. 대신 하얗게 변한 머릿속이 아비뇽에서 별을 바라보고 있을지 모를 그녀로 채워지고 있었다.
비행기 안에서 대화를 나눌 때도 그랬지만, 그녀와의 수다는 술술 풀렸다. 마치 맑게 졸졸졸 잘 흐르는 냇물 같았다. 음악 이야기에도 여행 이야기에도 우리는 착착 코드가 잘 맞았다. 그녀는 다른 사람의 말을 주의 깊게 들을 줄 알았고, 자신이 아는 한에서 충분히 자신의 생각을 적극적으로 말할 줄 알았으며, 자신과 생각이 다를 때도 상대를 충분히 배려하는 마음을 보였다.
덕분에 나는 여행의 여정이나 새로운 풍경보다 그녀와 나누는 이야기, 그녀와 함께 하는 식사에 어느 순간 더 마음 설레고 있었다. 눈을 감았다 뜨고 나니 벼락스타가 되었더라는 누군가의 이야기처럼, 느닷없이 내 여행의 하루하루가 그녀로 채워지고 있었다. 누군가를 좋아하는 감정은 자연스러운 게 아니냐고 혼자 위로하기도 하고, 남자친구가 있을지 모르는데 언감생심 무슨 말이냐고 책망하기도 하고, 괜히 마음 들켰다가 분위기만 어색해져서 동행으로 충분히 좋던 관계마저 망칠 수 있다는 걱정이 들기도 했다. 그녀와 잠시 떨어져 혼자 아를에 있으려니 그녀에 대한 생각들이 더욱 머릿속에서 시끌시끌하게 울렸다.
나는 최대한 무심하게 짧은 문장으로 그녀에게 문자를 보냈다. 아를은 좋았다는 말과 아비뇽 날씨는 어떤지만 물었다. 아무 것도 못하고 한 시간을 기다려 그녀의 짧은 답 문자를 받았다. 그녀 역시도 내게 사진은 많이 찍었냐고만 물어왔다. 파란 하늘이 담긴 아비뇽의 사진 한 장과 함께. 그리고 내일보자는 말을 덧붙였다.
내일보자는 그 짧은 한 문장이 이렇게 아름다운 말이었던가. 나는 수십 번을 읽고 또 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