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간 을씨년스런 들과 다리를 여러 번 건너 퐁뒤가르 입구에 도착했다. 주차장에서는 수도교의 모습이 전혀 보이지 않아 제대로 온 것인지 아리송할 정도였다. 겨울이라 관람객이 없어 혹시 폐장한 것은 아닌지도 걱정이었다. 다행히 입장이 가능했고 산책로처럼 생긴 길이 길게 이어졌다. 겨울인데도 숲은 울창했다. 숲이 끝나갈 무렵 강물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조금 더 걸으니 길 끝에 거대한 수도교가 기다렸다는 듯이 나타났다.
수도교 위는 바람이 강하게 불었다. 다리 중간쯤에서 아래를 내려다봤다. 거칠게 내려가는 진한 녹색의 강물은 신비롭고 두려웠다. 하지만 묘한 매력이 있어 눈을 뗄 수 없었다.
강물을 한참 내려다보고 있으면 주변의 많은 소음이 물소리에 묻혀 들리지 않는 순간이 온다. 복잡한 여행지에서 홀로 있고 싶을 때 내가 자주 쓰는 방법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듣고는 싶지만 모른 척 피해야 하는 소리를 쫓아내기 위해 강물 소리에 집중했다.
며칠 전부터 그녀는 호스텔 정원 구석 벤치나 고속도로 휴게소의 주차장에서 심각한 표정으로 전화를 했다. 멀리서 봐도 언성을 높인 말이 오고가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잠시 후 차로 돌아온 그녀와 모른 척 밝은 목소리로 이야기를 주고받아도 곧 차 안의 공기는 어색함으로 가득해지곤 했다. 처리해야 할 복잡한 일이 있겠지 라고 대수롭지 않게 넘기거나 무슨 일이 있건 내가 신경 쓸 일 아니라고 억지로 머리 밖으로 밀어내려 해도 자꾸만 신경이 쓰였다. 아마도 남자겠지, 애인이 없을 리가 없지, 결혼할 사람이 있는 걸까 등의 궁금증과 상상이 자꾸만 머릿속을 떠다녔다. 그러느라 한참동안 그녀와 대화 없이 운전만 하기도 했다. 어쩌면 분위기를 어색하게 만드는 것은 나였는지도 모른다. 내가 왜 그녀의 전화에 억지 추측을 보태며 심각해지는지 알 수 없었다. 아니 그게 질투라고 스스로 물을 수도, 확인할 수 없었다.
멀리 언덕 위에 빨간 지붕 풍차가 조그맣게 보였다. 파란 하늘 밑에 붉은 풍차. 낡고 오래되고 애틋한 풍경에 쉽사리 마음을 빼앗기는 내가 오래된 풍차를 그냥 지나칠 수는 없었다. 다행히 우리가 이동하는 방향과 풍차가 같은 곳에 있었지만 설령 방향이 반대라 해도 자동차 핸들을 꺾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풍차는 작은 산을 공원으로 만든 곳에 있었다. 산책로를 따라 올라가면 시야가 탁 트인 곳에서 들을 내려다보고 서 있는 풍차.
하지만 더 신나는 일은 풍차가 그냥 풍차가 아니란 사실. 이곳은 알퐁스도데의 작품 ‘별’에 등장하는 장소였다. 레보 드 프로방스의 뤼브롱산을 배경으로 양치기 목동의 순수한 사랑이야기가 남아있는 그 언덕이었다.
풍차 옆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는 남녀를 보며 두 사람이 연인인가 아닌가에 대하여 그녀와 이야길 나누다 그녀가 짝사랑에 대하여 물었다.
“그럼, 이룰 수 없는 사람을 짝사랑하면서 그 사람에게 고백해 본 적 있어요?”
“응? 아니요.”
“왜요? 어차피 이룰 수 없어서?”
“아니, 그 사람과의 모든 관계가 사라질까봐 두렵거든요. 그래서 그 사람에 대한 사랑이 깊어질수록 더 철저하게 마음을 숨기려고 노력해요. 이룰 수 없는 이에게 내 마음을 드러내는 것은 모든 관계를 끝내는 길로 들어서는 거니까.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 그 감정을 숨기는 일은 너무 아프지만, 괜히 고백했다가 아예 만날 수조차 없게 되는 건 더 슬프지 않나요? 사랑하는 이의 얼굴도 보고, 이야기도 나누고, 가끔 식사를 할 수 있다면 전 그걸로 만족해요. 사랑의 설렘은 시간이 지나면 익숙함과 편안함으로 변한다고 하죠. 그러나 숨기고 있는 사랑의 설렘은 늘 그대로죠. 그 사람에 대한 모든 감정을 차가운 얼음 속에 넣어두었으니까요...”
카메라를 침대에 던져두고 식당으로 통하는 문을 열었다. 식당 안에는 어제 눈인사를 나누었던 아프리카계 프랑스 신혼부부가 앉아 책을 읽고 있었고, 그녀는 그들과 멀리 떨어진 테이블 앞에 앉아 있었다. 전화를 만지작거리던 그녀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 웃으며 손짓을 했다.
“아까 낮에 하던 짝사랑이야기 더 할까요? 질문 받은 것에 제가 대답 안 했잖아요.”
“아? 네...그래요. 불편하면 굳이 말하지 않아도 되는데...”
“아니요, 불편해서가 아니라 아깐 생각이 정리가 안 돼서요.”
그녀는 와인을 채워 내 앞에 내밀었다.
“전 짝사랑 별로에요. 혼자 하는 사랑이 당사자에겐 애틋하고 절절한 감정이겠지만, 겁쟁이처럼 보여요. 아직 얻지도 못한 걸 잃을까봐 두려워하는 거죠. 우습지 않아요?”
짝사랑..... 내 것도 아닌 걸 잃을까 겁내는 것. 나는 앞에 놓인 와인을 들었다.
그녀의 짝사랑에 대한 이야기는 나를 혼란스럽게 했다. 타이밍을 놓쳐버려 남자친구가 있느냐는 질문을 할 수도 없고, 짝사랑에 대한 내 마음을 너무 솔직하게 드러내버렸는데 그녀는 소극적인 짝사랑을 겁쟁이라고 말했다. 그녀는 내 마음을 눈치 챈 것일까? 불면증이 아니더라도 일찍 잠들기는 힘들 것 같은 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