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여행은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는 시간여행이다. 한국보다 8시간이 느린 유럽에서 한국으로 전화를 걸면 마치 미래에 있는 사람들을 만나는 기분이 들었다.
가족끼리 광장에 나온 사람들이 유난히 많았다. 통화를 하며 앞서 걷는 그녀의 전화 내용을 엿듣고 싶지 않아 거리를 두고 천천히 걸었다. 나도 어디든 전화를 걸고 싶었지만 한국 시간으로는 새벽이라 여의치 않았다. 휴대폰의 연락처를 둘러보다가 집 전화번호에 눈이 갔다. 아무도 받지 않는 집으로 전화를 걸어 한참이나 통화 연결음을 들었다.
전화를 마친 그녀가 저만큼 앞에서 돌아보며 웃었다. 해를 등진 그녀가 너무 눈부셔 전화를 받는 척하며 고개를 돌리고 빈 전화기에 말을 했다.
“응, 나 잘 지내고 있어.”
나는 광장의 가로등을 좋아한다. 불이 켜지지 않는 낮에는 아무도 가로등에 신경 쓰지 않는다. 나에게는 오히려 잘된 일. 늘 그 자리에 서서 어둠이 찾아오길 기다린다. 어둠이 오면 비로소 가로등은 모든 이에게 골고루 빛을 나누어준다. 아무도 신경 쓰지 않던 존재가 어둠 속에서 홀로 빛난다. 그 모습이 참 아름답다.
볕이 좋아 여기저기 기웃거리다보니 어느새 해가 지고 광장마다 가로등이 켜진다. 가로등이 고장 나, 빛이 사라지고 나서야 사람들은 그 빛의 소중함을 알겠지. 어둠에 갇혀 빛을 아쉬워하겠지. 사라진 후에야 떠난 사랑의 빈자리를 깨닫듯이. 사랑의 소중함을 늘 너무 늦게 알게 되는 우리의 삶처럼.
가까이 있는 것들의 가치를 잊고 살아가는 이 고질병을 무엇이라 불러야 할까? 근거리 기억상실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