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에도 시내버스가 있다.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를 왜 하느냐고 생각하겠지만 제주도 여행의 교통수단은 다른 선택지를 두지 않고 늘 렌터카였다. 제주의 도로에서 수없이 많은 버스를 마주쳤지만 그 존재를 의식했던 기억이 없다. 토요일 이른 시간에 버스에는 아무도 없었다. 큰 도로를 벗어나자 금세 좁은 마을 도로를 달렸다. 시골 버스를 언제 타보았는지 기억이 가물가물했다. 고등학생 때 고모님 댁에 놀러가 탄 것이 가장 최근이었으니 25년이 훨씬 지난 일이다.
어떤 것들은 언제나 그 자리를 지키며 존재하는데도 내가 그것을 잊고 살고 있다. 물건도 장소도 사람도 그렇다. 여전히 자신의 역할을 다하며 그 자리에 있는데 누군가에게 잊혀진 그 것, 그 장소, 그 사람의 마음이 어떨지 상상해본다. 나와 인연이 닿아있음에도 내게 잊혀진 존재들에게 미안해졌다.
#2
섬과 종교적 성지는 전 방위의 개방과 봉쇄, 비밀스러움을 동시에 지니고 있다. 특히 섬 안에 자리 잡은 사찰이나 수도원, 성당, 신사 등은 그 성격이 더 짙다. 사람이 섬이나 깊은 산 속의 성당, 절, 하다못해 도심 속 기도처를 찾는 이유는 믿음과 신앙의 의미도 있지만 원초적인 폐쇄 욕구가 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세상을 혼자 살 수 없지만 때로는 스스로 자신을 세상과 잠시라도 단절시키고 싶은 마음, 오로지 자신만 바라보고 싶은 마음 때문이 아닐까?
#3
나를 포함해 도보 여행자는 유독 혼자 여행하는 사람들이 많다. 오로지 자신의 걸음에만 집중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자신의 걸음에 집중하는 것은 결국 자신을 들여다보고 싶은 마음이다. 혼자 길을 찾고, 걸으면 힘들고 지쳐 복잡한 생각으로부터 벗어나게 된다. 몸은 힘들지만 오히려 머리는 편안해지고 고요해진다. 자연의 소리와 자신의 숨소리만 들리는 깊은 숲길에 혼자 있어보면 홀로 걷는 여행의 약효가 온 몸에 퍼지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나’만 들여다보는 시간은 여행이 깊어지고 길어지면 점차 확대되어 세상을 바라보는 눈으로 바뀐다.
#4
작은 탁자를 앞에 두고 모여 차와 담소를 나누고 있는 듯한 모습의 석불 곁에 앉았다. 관음사의 공간 배치가 포근하게 가슴 여기저기를 쓰다듬는 기분이었다. 편안함과 행복감이 내 주위를 감싸고 있었다.
우리는 식당에 앉아 밥을 주문하고 주문한 식사가 나오지도 않았는데 이미 식사 후에 할 일을 생각하는 삶에 익숙해져 있다. 바쁘고 성실하게 살지만 그것은 겨우 당장의 시간을 견뎌내고 있을 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바쁘게 사느라 그 삶의 의미와 가치, 꿈을 생각할 겨를이 없다. 어찌될지 모를 미래의 행복을 위해 당장의 행복은 모르고 산다. 지난날 꿈꾸었던 미래의 행복한 날이 지금 이 순간일지도 모르는데 아직은 아니라고 뒤로 미루며 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