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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배종훈 Sep 16. 2018

누구나 아는 아름다움은 1% 뿐

와카야마, 키이가츠우라를 게으르게 여행하다

아침을 일찍 먹고 짐을 쌌다. 신구로 나가는 버스를 타야했다. 하루에 네다섯 번이 전부인 버스를 놓치면 큰일이었다. 어젯밤에 미리 몇 번이나 버스 시간을 확인했지만 혹시나 버스가 지나가버렸을까 30분이나 일찍 정류장에 섰다. 버스가 눈 앞에 나타날 때까지 조마조마할 내 모습이 계속 어른거렸다.    





표지판 하나만 덜렁 서 있는 버스 정류장 자판기에 어제 새롭게 발견한 젤리탄산 음료가 들어 있었다. 죽이 잘 맞는 친구를 만난 것처럼 신났다. 두 개를 뽑아 단숨에 마시니 흥얼흥얼 노래가 자동으로 튀어 나왔다. 


버스를 놓칠까 조마조마하던 마음이 버스가 오기 전 노천 온천에 발이라도 담그러 갈까하는 생각으로 바뀔만큼 갑자기 느긋해졌다.    




나무 의자에 앉았다. 종일 동네 아이들과 여행객으로 북적이던 곳이 지금은 물소리와 새소리 뿐이다. 시간에 따라 그 장소를 채우는 소리가 다르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은 인간의 소리가 담길 시간이 아닌 것 같았다. 


시계나 스마트폰이 없어도 그림자와 어둠이 시간을 느끼게 한다. 시간을 느끼려면 눈으로 보는 시계가 없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버스는 며칠간 내가 돌아본 혼구 지역을 한 바퀴 돌아 신구역에 도착했다. 신구에서 JR열차를 타고 미와사키, 기이사노, 우쿠이, 나치, 기이덴마를 지나 여섯 번째 역인 기이카츠우라가 오늘의 최종 목적지이다. 


해안선을 따라 달리는 풍경에 새로운 여행이 시작되는 것 같아 두근두근했다. 하지만 열차가 빨라 곧 내려야 한다는 방송이 흘러 나왔다. 지하철이 아닌 열차 이용에 들떴는데 내려야한다니 야속했다.    




기이카츠우라도 시골의 작은 역이었다. 시내버스가 회차하는 작은 광장엔 간단한 식사와 커피를 파는 동네 카페와 오래된 버스터미널 하나가 전부였다. 온천민숙의 체크인 시간도 남은데다 배가 고파 카페에 들어갔다. 다방 느낌의 낡은 인테리어와 고운 노부인의 인사가 마음에 들었다. 달걀이 들어간 샌드위치와 커피를 시켰다. 여행객으로 보이는 사람은 나 하나 뿐이라 더 좋았다. 


구글 지도를 열어보니 숙소는 아주 가까운 거리에 있었다. 커피도 느긋하게 마시고, 샌드위치도 천천히 먹었다. 시간에 맞추어 움직여야 하는 오늘의 일정은 모두 마쳤기 때문에 


마음이 편안해지고 시간이 느리게 흐르기 시작했다.    




내일 살펴볼 나치산행 버스 시간을 확인하고 시장 골목을 따라 걸었다. 항구 방향으로 길게 늘어선 시장 골목을 가로 질러 200미터 정도 걸으니 꽤 규모가 큰 온천민숙이 있었다. 예약을 변경하려고 며칠 전 연락했을 때 만실이라 변경이 불가능하다는 말을 들었는데 아직은 체크인을 한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은지 한가했다. 온천 이용 방법과 방 위치, 식당과 식사 시간 등의 설명을 듣고 가방을 아무렇게나 던져두고 방에 누웠다. 다다미 바닥의 까슬까슬한 느낌이 서늘하고 좋았다. 


투박한 나무 막대에 매달린 방 열쇠가 여긴 편안한 곳이라고 속삭이는 것 같았다.    



노트와 펜 하나만 들고 방을 빠져나와 골목으로 들어섰다. 길은 고요하고 단정했다. 담벼락에 기대 그림을 그리고 있는데 옆에서 인기척이 있었다. 그림을 그리고 있는 길을 그냥 지나치지 못해 조심스레 서 있는 동네 아주머니가 웃고 있었다.


“すみません(스미마셍)”


삐딱하게 기대섰던 자세를 고치고 지나가도 좋다는 목례를 건넸다. 그림을 그리고 있으니 방해하지 말라는 보이지 않는 벽을 만들어 두었던 일에 대해 나도 웃으며 사과했다. 


“すみません(스미마셍)”    





한참동안 골목을 걸으며 그림을 그리고 돌아다녔다. 얼핏보면 별 것 없는 이런 골목은 구석구석에 그림이나 사진으로 담고 싶은 보물이 숨겨져 있다. 


해가 질 무렵 다시 시장길로 들어섰다. 동네가 워낙 작아 어디로 걸어도 15분 이상을 걸을 수 없었다. 모퉁이를 돌아 작은 건널목이 있는 사거리에서 신호를 기다리고 서 있었는데 머리 위에서 빛이 깜빡거렸다. 고개를 드니 가로등이 켜지고 있었다. 도로명을 밝히는 가로등이 정겹고 예뻤다.    




시장이 끝나는 길에 노란 간판을 단 서점이 있었다. 특별할 것 없는 동네 작은 서점이 판타지 영화에 나오는 마법의 서점처럼 보였다. 문을 열고 들어서면 독특한 눈빛을 지닌 주인이 무심한 듯 나를 지켜보고, 고른 책에 따라 별난 경험을 하도록 만들어주는 그런 곳 말이다. 


주인으로 보이는 중년 부부가 책을 정리하고 카운터에서 무언가를 살펴보고 있었다. 길에 서서 서점을 그리고,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들어섰다. 문에 달린 방울 소리에 흠칫 놀라 아이쿠 소리가 나왔다. 자연스럽게 들어서려고 애썼던 것이 들킨 기분이었다.    



낮에 찍은 사진과 메모, 그림을 뒤적이다가 잠들 시간을 놓쳐버렸다. 드르륵 소리를 내며 열리는 나무 창문을 열고 산 위에 가득한 별을 보다 약간 우울해진다. 딱히 누군가를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아니지만 누구에게든 오늘 하루를 이야기하고 싶어졌다. 술 보다는 진한 아메리카노 한 잔이 하고 싶다.


대부분의 가게들이 문을 닫았다. 카페를 찾아 나선 골목길 모퉁이를 돌아서자 항구였다. 역시 카페는 없었고 은은한 불을 밝힌 포장마차가 하나 있었다. 바다에는 출항하는 배의 불빛들이 흔들리고, 포장마차에서 들리는 사람들의 소곤거리는 소리가 아름다웠다. 




이 이름 없는 골목을 나중에 누군가에게 알려주려면 무엇이라 불러야할까? 정확하게 설명할 방법이 없다.


세상에는 누구나 아는 아름다운 곳이 1%, 알려지지 않은 아름다움이 99%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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