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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배종훈 Sep 13. 2018

경계가 사라지는 순간

와카야마 구마노고도 순례길

낯선 골목 여행의 매력은 어디가 어딘지도 모른채 그냥 돌아다니는 것이다. 그곳에서 길을 잃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낯선 곳이니까. 


그 두려움을 내려놓으면 모든 것이 예쁘고 행복하다. 


나치산으로 가는 버스 창밖에 빠져 있다가 일정을 바꿔 이 골목에 내려볼까하는 생각이 들다가 억지로 참았다. 돌아오는 길에 다시 도전해봐야겠다.



여행 중에도 빠트릴 수 없는 것은 무엇일까? 무엇을 먹고, 어떤 것을 입고, 어디서 자느냐의 문제다. 사람은 먹고 자고 입는 문제에서 자유로울 수 없지만 결국 그것이 삶의 가장 큰 부분이 아닐까?    


게으른 여행자는 어쩌면 손해를 본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유명한 장소와 순간을 놓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번에 못본 것 보러 다시 와야겠군하는 즐거운 핑계가 생겨 좋다. 

그것도 역시 게으르고 느긋한 여행자의 특권.    



연속으로 계단을 올랐더니 등에 땀이 주르륵 흘렀다. 마지막 계단을 올라 뒤를 돌아보니 꽤 높이 올라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행이 아닐 때도 가끔 트레킹을 하며 체력을 유지하겠다고 늘 다짐을 하지만 일상으로 돌아가면 쉽지 않다. 이렇게 눈이 시리도록 파란 하늘과 경치가 주변에 별로 없어 운동 할 맛이 안나서라고 혼자 우길 수 밖에 없다.    



세상에서 가장 지키기 어려운 것은 역시 스스로와의 약속이다. 

내가 나를 이기지 못하면 단 한 번도 그 약속을 지켜낼 수 없다.     



혼구의 오유노하라에서 찍기 시작한 스탬프 놀이가 여전히 즐거웠다. 나치타이샤를 도안한 스탬프를 찾아 잉크를 골고루 뭍혀 순례증에 꾸욱 찍었다. 많이 찍어보니 어느새 요령이 생겼는지 한번에 깔끔하게 찍는 방법을 터득했다. 깨끗하게 찍힌 스탬프를 보니 뿌듯했다.


귀찮고 사소한 일도 그 안에서 재미를 찾아내면 과정과 결과가 달라지고 보람도 찾아온다. 순례 스탬프 찍기 달인 대회가 있으면 출전해야 할 것 같았다.  




스페인 순례길을 걷고 일년 후 이곳으로 왔다는 호주에서 온 토마스는 동양문화에 관심이 많아 보였다. 순례 스탬프 위치를 몰라 두리번거리고 있는 모습을 보고 위치를 알려주면서 간단히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산티아고 순례길과는 다른 일본의 순례길에 매력을 느끼고 있다고 했다. 여차하면 순례길과 신사 등 일본 문화에 대한 질문이 쏟아질 것 같아 서둘러 인사를 나누고 자리를 옮겼다.     




혼구 방향으로 오갈 수 있는 순례길이 나치타이샤 옆으로 있었다. 길을 걸어 다시 혼구까지 갈 순 없지만 관광객으로 북적이는 곳을 잠시 벗어나고 싶어 순례길로 들어섰다. 한 줄기 숲 사이로 뻗은 길은 그냥 걸으라는 것처럼 놓여 있었다.    




나는 언제나 신나는 마음으로 걷기 시작해 조금 가다보면 금세 같은 생각이 불쑥 고개를 들었다. 오늘은 걷지 말까? 돌아갈까? 하는 생각말이다. 또 그런 생각이 들어 피식 웃음이 났다. 사실 그런 마음이 들었을 때 출발 장소로 되돌아오거나, 그 자리에 앉아 멈춘 일은 없는데도 그 마음은 항상 가슴 속에 자리 잡고 있다가 통행세를 받으려는 동네 불량배처럼 불쑥 머리를 들이밀었다. 내 마음 속에 그런 삐딱하고 껄렁거리는 녀석이 살고 있다는 게 가끔 즐겁다. 언젠가 한번쯤 그 녀석에게 지는 날이 있었으면 좋겠다.    





한참 걷다보니 나무에 부딪치는 바람 소리 뿐 아무 소리도 없는 길 위에 있다는 것을 알았다. 머리를 들어도 하늘이 제대로 보이지 않을 만큼 깊은 숲이었다. 복잡한 소리가 없이 하나의 소리만 있는 공간이 참으로 편안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방에서 물을 꺼내 마시고 돌아섰다.


구마노고도로 들어섰던 계단으로 다시 내려와 기념품과 간단한 음식을 파는 매점에서 블루베리 아이스크림을 샀다. 당 보충이 필요한 순간이었다.    



세이칸토지와 나치 폭포가 함께 찍히는 포토존에 사람들이 많았다. 자신이 원하는 장면을 담기 위해 이리저리 위치를 옮기고 좋은 자리를 선점하려는 신경전이 느껴졌다. 난 사람들이 덜 북적이는 포인트에 자리를 잡고 스케치북을 펼쳤다. 그림에서는 내 마음대로 풍경을 막고 서 있는 사람들을 빼버릴 수 있으니까.    



나치폭포를 지나 다이몬자카로 이어지는 순례길을 따라 걸었다. 넓고 편안한 내리막은 여유로웠다. 나무 사이로 비치는 오후의 따뜻한 햇살도 편안했고 숲 향기와 땀을 식히는 바람이 좋았다. 옛 순례자 복장을 한 여행자 둘이 앞서 걷고 있었다. 이 순간을 완성하는 가장 완벽한 조각이 맞춰지는 순간이었다.    





다이몬자카를 앞두고 마을로 진입하는 다리와 붉은 도리이가 있었다. 물이 갖는 종교적 의미를 따지지 않더라도 이쪽과 저쪽을 갈라놓은 물을 건너는 다리는 공간을 이동하는 특별한 장치처럼 보였다. 이 순간 나는 신성한 사원을 뒤로 하고 인간이 사는 세계로 진입한다는 생각에 기분이 묘해졌다.    




다이몬자카(大門坂)라는 이름 그대로 이 자리에는 커다란 문이 있었을 것이다. 아마도 혼구타이샤에 있는 거대한 도리이와 비슷하거나 어쩌면 더 컸을지도 모르겠다. 차라리 실재하는 것이 없기에 그 거대한 문을 상상할 수 있다. 목이 뻣뻣해질만큼 올려다봐야하는 거대한 문. 신의 영역에 진입하는 엄숙함과 장엄함이 여전히 주변을 안개처럼 감싸고 있는 것 같았다.    


늦은 시간까지 문을 여는 편의점이나 음식점 등이 없는 곳에 있으니 내가 생활하는 도시가 얼마나 편리한 곳인지 새삼 고맙다. 부족하고 불편해져야 현재 당연하게 누리는 것의 가치를 알게 된다. 그리 늦은 밤도 아닌데 출출한 배를 채울 간식이 하나도 없었다. 배달 음식점도 없고, 그나마 골목 모퉁이에 있던 작은 술집이 붉을 밝히고 있었다. 드르륵 소리가 나는 미닫이 문을 열고 들어서니 요리사와 얼굴을 마주해야 하는 자리만 하나 남아 있었다. 참치회를 뜨고 있는 나이든 요리사의 눈빛에 약간 주눅이 들었다.



문을 열고 이미 한 쪽 다리를 넣은데다 가게 안의 모든 사람들의 시선을 받은 상태라 그냥 나갈 수도 없었다. 종업원의 인사를 받으며 어쩔 수 없이 하나 남은 자리에 엉거주춤 앉았다. 한국어나 영어 메뉴도 없어 선택할 것이 별로 없었다. 참치회와 맥주. 하지만 회를 뜨는 요리사의 손놀림을 보고 있으니 어쩌면 그것이 최고의 선택일 것 같았다. 그리고 결과는 탁월했다.



<일본 소도시 드로잉 에세이- 마음을 두고 와도 괜찮아> 

더 보러가기- 

http://www.yes24.com/24/goods/63843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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