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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배종훈 Sep 19. 2018

적멸의 순간을 맛보고 싶다면...

아키타-요코테 마츠다마치, 오야스쿄 온천향

눈이 소복히 내린 옛 도시를 그려야겠다는 마음에 난 이미 요코테 어느 골목을 걷고 있었다.

이젠 눈을 떠올리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곳이 아키타가 되었다. 모든 것을 백(白)으로 덮은 고요함이 무엇인지 말해주는 그 곳.


그냥 거기에 자리 잡고 있을 그 골목길에서 무작정 걷고, 달을 보고, 까만 밤을 하얗게 만드는 눈을 맞으며 걷고 싶었다.    


하지만 눈을 감으면 한 번에 날아가는 상상 속의 아키타와 달리 눈보라를 헤치며 버스를 타고 몇 시간이나 가야하는 아키타는 다른 곳이었다. 미끄러운 눈길을 엉금엉금 기어 8킬로쯤 되는 길을 두 발로 걷는 속도보다 느리게 네 발로 갔다. 그냥 내려서 걸어가 볼까하는 마음이 자꾸 솟다가 어딘지도 모르는 추운 길을 답답한 마음에 나섰다가 고생만 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지 않았나하는 마음이 다행히 날 붙잡았다. 


“이 춥고 눈 내리는 곳에 내가 미쳤지.”하는 소리가 수백 번 입 밖으로 나오고 싶어 안달이었다.


겨우 버스에서 내려 어느 상점의 처마 밑에서 눈을 털고 나서야 상상으로 한 번에 날아온 요코테를 다시 마주했다. 참 고약하고, 변덕스럽고, 뻔뻔한 마음이다.


‘한 겨울에 여길 왜 왔나...’했던 그 마음은 이미 없었다.

처음 요코테 마스다마치에 가서 그림을 그린다고 들떴던 다시 그 순간이었다.    



눈이 쌓이는 소리만 들리는 고요한 거리를 걷다가 내 발소리가 오히려 소음이 되는 것 같아 자리에 멈췄다. 적막. 적멸의 시간이다. 


쌓인 눈 때문에 집을 이루고 있는 목재들이 내는 삐걱삐걱, 두런두런, 들썩들썩 소리도 적멸의 순간 모두 숨을 죽이는 것 같았다.    


그 찰나의 한 순간을 그림으로 그리고 싶었다. 거리가 보이는 작은 찻집에 들어가 창가에 앉아 종이를 펴고 펜을 꺼내 준비를 마쳤지만 마음이 혼란스러운지 집중이 되질 않았다. 사각거리는 연필 소리조차 세상에서 나 혼자 소음을 만들어 내고 있는 것 같았다. 


적멸을 순간을 그리고 싶어하면서 온통 쓸모없는 소리만 내는 나는 대리석으로 된 바닥에 유리구슬 한 통을 쏟아버리고 어쩔 줄 몰라하는 기분이었다.     


연필과 종이만 들썩이다 모두 테이블 위에 내려두었다. 

나를 제외한 모든 이들이 같은 생각, 같은 행동을 하고 있을 때 느껴야하는 고독함을 또 마주치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그 고독을 견디고 즐겨서 내가 지금 이 자리에 이렇게 앉아있는 것이 아닌가.


차라리 느긋하게 외로움과 고독을 즐기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그러다보면 다시 그림을 그릴 순간이 올 것 같았다.    



어두워지기 전에 숙소에 도착해야 할 것 같았다. 겨울이라 금세 어두워지는 것도 문제였고, 기온이 빠른 속도로 떨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 조바심은 도로를 빠져나와 시골 마을길로  들어서면서, 사위가 어둠에 들면서 조금씩 조금씩 사라졌다. 속도를 낼 수 없는 1차선 빙판길 때문인지, 자동차 전조등에만 의지해 나아가야 하는 어둠 때문인지는 몰라도 차라리 마음이 편해졌다. 창문을 조금 내리고 팔을 내밀어 바람을 맞았다.     

     

가방과 옷을 아무렇게나 내려두고 창문을 열었다. 시원한 산 공기를 깊게 들이 마셨다. 냄새, 맛 등에 크게 민감하지 않지만 확실히 공기가 달랐다. 바람에 흔들리는 숲의 소리, 새 소리가 한꺼번에 들렸지만 각각의 소리가 분명하게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기도 하고, 음악처럼 조화를 이루기도 했다.


언제나 이렇게 여행에서의 시간은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자유와 아무 것도 하지 않아도 되는 자유를 내 앞에 펼쳐든다. 오늘은 어떤 카드를 고를 것이냐고 느긋하게 달이 묻는다. 



잠을 이루지 못하다가 별이 가득한 밤 하늘이 아름다워 조용히 방을 빠져 나왔다. 그리고 아무도 없는 노천 온천에 앉아 푸르스름한 달을 만났다.


‘제가 여기 계신 달님 보러 이렇게 왔습니다.’라고 하니 달은 역시 푸른 웃음을 지었다.


다시 방에 들어가 남은 잠을 자기엔 아쉬운 새벽이었다. 눈이 다시 내리기 시작했고 멀리 누군가의 집에서 새어나오는 노란 불빛이 따뜻했다.     



어느새 잠이 들었는지 지붕에 쌓인 눈이 툭 떨어지는 소리에 눈을 떴다. 새벽에 다시 내리기 시작했던 눈이 여전히 내리고 있었다. 일어나 방문을 활짝 열고 가만히 누워 눈을 듣는다.


깊은 온천 마을에서는 아무 것도 아닌 일상이 다 특별한 것만 같았다.

이 순간에 최선을 다하며 살아야하는 말을 하고, 그림을 그리며, 막상 나는 지금 이 순간에 일상의 소중함, 특별함을 새삼 느끼고 있다.    



눈 때문인지 온천 마을에는 아침에도 밤처럼 소리가 없었다. 산책을 하다가 빼꼼히 무료 족욕탕 문을 열어봤다. 약한 등이 켜진 어두운 실내에 따뜻한 물이 있어 포근했다. 신과 양말을 벗고 발을 담갔다. 온기가 찌르르하고 머리까지 올라왔다. 


누구에게 하는 말인지 모르겠지만 “잘 쉬었다 갑니다.”라는 말이 하고 싶었다.

<일본 소도시 드로잉 에세이- 마음을 두고 와도 괜찮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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